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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5일 “선택할 권리와 실패할 권리” <김 현 철 죽호학원 이사장>
요즘 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단어는 바로 고교학점제입니다. 학생이 스스로 과목을 고르고, 진로에 맞는 시간표를 설계하며, 자기만의 배움을 만들어가도록 하자는 제도입니다. 참 멋진 말입니다. “이제는 선택의 시대다. 아이들에게도 선택권을 주자.” 우리는 선택할 권리가 넓어지면 아이들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쉽게 기대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보면, 다른 얼굴이 보입니다. 과목을 정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이 과목 잘못 선택하면 어떡하지?”, “나만 뒤처지면 어떡하지?”, “부모님이 실망하시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이 먼저 앞서는 학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선택권은 분명 넓어졌는데, 그만큼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커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선택할 권리”는 말하면서도 “실패할 권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색하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과거 기업의 CEO로 일하던 시절, 직원들에게 ‘실패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었습니다. 성과가 좋았던 프로젝트 보고서만이 아니라, 시도했다가 기대만큼 결과가 나오지 못한 사례를 정리해 오도록 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누가 잘못했는지”를 적는 대신, “어디에서 판단이 흔들렸는지, 어떤 가정을 잘못 세웠는지, 다시 한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를 담게 했습니다. 실패를 처벌이나 징계의 근거로 쓰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학습 자산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조직은 결국 선택 자체를 두려워하는 조직이 된다는 사실을요.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겉으로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조직의 미래는 조용히 뒤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에게 “네 진로에 맞는 과목을 스스로 골라 보라”고 말하면서, 막상 그 선택이 흔들릴 여지는 충분히 열어두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과목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어렵고, 내 적성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원하던 진로가 시간이 지나며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배움의 방향이 몇 번이고 흔들리는 것, 그것은 실패라기보다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치는 ‘곡선’입니다.
고교학점제의 핵심은 학생이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선택하고, 필요할 때는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 있습니다. 즉, 이 제도 안에는 “시행착오를 책임 있게 경험하도록 돕는 교육철학”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교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할까요. “네가 선택한 수업이 너무 어렵다면, 한 번 조정해도 괜찮다.” “진로가 바뀌었다고 해서, 네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시도해 본 용기 자체가 이미 배움의 절반이다.” 학생이 한 번의 선택으로 평생을 결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선택과 수정, 그리고 작은 실패를 통해 자기 삶을 설계해 가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야한다는 것입니다.
고교학점제가 성공하려면 학교는 실패해도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한 번 흔들렸다고 낙오자로 낙인찍는 곳이 아니라, 다시 진로를 가다듬을 수 있도록 옆에서 지도하고 동행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선택의 시대에 진짜 필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을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입니다. 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의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게 만든다면, 그 어떤 제도 혁신도 종이에 적힌 문장에 그칠 뿐입니다.
저는 기업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죽호학원의 이사장으로서도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실패해 볼 수 있는 학교, 그래서 더 담대하게 선택해 볼 수 있는 학교를 꿈꿔봅니다. 선택할 권리와 실패할 권리,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허락될 때, 고교학점제는 비로소 제도의 이름을 넘어 아이들을 믿는 방식, 교육의 철학을 바꾸는 진짜 혁신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