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전문 보기
2026년 7월 16일 “사과 반 조각의 시간, 정리는 결핍인가 여유인가 ” <한은미 전남대 화학공학과 교수>
달력을 넘기다 보니, 1년의 절반이 훌쩍 지나 묘한 공허함이 남습니다. 식탁 위의 빨간 사과를 방금 반으로 갈라놓은 것 같았는데, 그 반쪽이 금새 사라진 듯합니다. 왜 시간은 때로 화살처럼 지나가고, 때로는 길고 풍성하게 느껴질까요? 여행 같은 새로운 경험은 뇌에 더 많은 자극을 남겨 시간을 길게 느끼게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은 어느새 시간을 통째로 흘려보내 버립니다. '기억의 밀도'가 다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시간을 더욱 빠르게 사라지게 만드는 묘한 미루기 습관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을 바로 시작해야 하는데도 서랍 속에 쑤셔놓은 영수증을 정리하거나, 책장에 꽂은 책을 넣다 뺐다 재배치하기도 하지요. 이상하게도 중요한 일을 앞둘 때마다 그런 행동이 반복된다면, 어쩌면 그것은 정리가 아니라 해야 할 일로부터 잠시 숨고 싶은 심리가 만들어낸 방어기제인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능동적 회피'라고 부릅니다. 해야 할 일 앞에서 불안이라는 파도가 너무 높을 때, 우리는 책상부터 정리하며 나만의 안전한 섬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게으르다”, “소극적이다”고 쉽게 비난하지만, 저는 교육자로서 그 침묵 뒤에 숨은 작은 ‘비명’들을 듣곤 합니다.
의욕이 없어서 미루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할까 봐, 잘해내지 못할까 봐,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시작조차 망설이며, ‘심리적 셧다운’을 가동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그침보다 작은 성공의 경험입니다. 주어진 일을 쪼개어 '해보니 되더라'라는 경험을 하나둘 쌓게 될 때, 아이들은 비로소 미루기를 멈추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때론 그렇게 돌아가는 시간마저 단순한 회피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거친 파도 속에서 나라는 배를 띄우기 위해, 스스로 닻을 내리고 마음을 다잡는 가장 치열한 생존의 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신뢰하고 기다려주는 작은 믿음이 있을 때, 아이들은 마음의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인생의 반을 지나며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흘려보내지 않는 것, 그리고 결국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조금씩 쌓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정리를 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삶의 여유를 위한 정리입니까, 아니면 시작이 두려워 잠시 빙 돌아가고 있는 마음의 우회로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