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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5일 “전남광주, 또 하나의 승산마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강홍규 GIST 차세대에너지연구소 부소장>
경남 진주의 작은 마을 승산리에 위치한 지수초등학교는 한국 경제사의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삼성의 이병철, LG의 구인회, 효성의 조홍제 등 산업사를 이끈 거목들이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배경에는 학교를 넘어선 시대와 지역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승산마을은 부유한 가문과 탄탄한 관계망이 형성된 곳이었고, 전통 농업 사회에서 근대 산업 사회로 넘어가던 전환기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안정된 기반 위에서 함께 성장한 아이들과 시대의 기회가 겹치며 산업을 이끄는 인물들이 탄생했습니다. 지수초등학교는 그 에너지가 응축된 기회의 교차점이었습니다.
오늘날 광주와 전남은 그 시절의 승산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전환기 앞에 서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이 화두가 된 ‘에너지 전환의 시대’입니다. 광주전남은 풍부한 일조량과 바람을 바탕으로 태양광과 해상풍력의 최적지라는 축복받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탄탄한 전력 인프라와 에너지 연구기관까지 갖춘 준비된 지역입니다. 자원과 인프라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이미 미래 에너지 산업의 ‘부자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깁니다. 자원이 풍부하다고 해서 저절로 산업이 꽃피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세계의 여러 산유국 중에는 막대한 자원을 보유하고도 혁신의 동력을 잃고 성장이 멈춰버린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축복'과도 같은 선물을 주지만, 그 선물을 찬란한 미래로 바꾸는 핵심 동력은 결국 그 땅에 뿌리 내린 ‘사람’과 ‘문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수초등학교의 기적이 단지 교과서 한 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광주전남에서 시대를 이끌 에너지 혁신가와 창업가가 나오기 위해서는 거대한 발전 설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전환기를 읽는 감각, 서로를 밀어 올리는 네트워크, 그리고 무엇보다 에너지를 이해하는 시민의 토양입니다. 에너지가 전문가들의 난해한 용어로만 머문다면 우리는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에너지가 우리 삶의 언어가 되고, 아이들의 일상적인 대화 주제가 되며, 지역 사회의 문화로 스며들 때 비로소 지식은 힘이 되고 전환기는 기회가 됩니다. 이러한 토양 위에서 자라난 우리 아이들이야말로 훗날 대한민국 에너지 산업을 이끄는 새로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광주전남은 곳곳에 또 하나의 승산마을을 만들어낼 충분한 자격과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습니다. 자원도, 기관도, 산업 기반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가 어떤 생태계를 만들어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훗날 누군가가 “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가”라는 탄식 대신, “어떻게 이곳에서 대한민국 에너지 산업을 뒤바꾼 거목들이 쏟아져 나왔는가”라는 경이로운 질문을 던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출발점은 오늘 우리 아이들을 위해 쌓아가는 교육과 문화의 토양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