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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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6일 “봄, 가장 먼저 열리는 전시” <변길현 광주시립 하정웅미술관장>

 남도의 봄은 늘 조용히 옵니다. 사람보다 바람이 먼저 계절을 알려주고, 사람보다 꽃이 먼저 봄소식을 전하죠.


 겨우내 말랐던 검은 들판에도 어느새 연한 녹색 빛이 돌고, 나뭇가지 끝에는 연둣빛 새순이 움틉니다. 매화가 먼저 피고, 산수유가 노랗게 번지고, 동백의 붉은 기운이 아직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꽃들이 차례차례 계절의 문을 엽니다.
 

 그래서 남도의 봄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풍경 전체가 조금씩 환해지면서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어느 지역보다 더 봄이 자연스러운 곳이 이곳 남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미술을 이야기할 때 흔히 미술관부터 떠올립니다. 조용한 전시장, 벽에 걸린 그림, 작품 앞에 잠시 멈춰 서는 시간 말입니다. 그림 앞에 마주서는 순간은 사실은 그림이 아니라 자기 앞에 마주서는 순간이죠. 남들이 보든 보지 않든 좋은 옷을 차려입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면서 자기 앞에 마주서는 순간, 저는 그 순간이 참 소중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이란 그런 짧은 순간들의 기억이겠죠.


 하지만 지금 같은 계절, 봄의 가장 아름다운 전시는 미술관 안보다 바깥에서 먼저 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고고히 서있는 매화 한 그루를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한 폭의 그림 앞에 서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희고 옅은 분홍빛 꽃잎은 주변 풍경을 조용히 밝히고, 

검은 가지는 그 빛을 더 또렷하게 받쳐줍니다.


 산수유의 노란색은 또 어떻습니까. 그 노란빛은 요란하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들길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 담장 너머로 가지를 내민 나무들, 봄볕을 받아 한층 부드러워진 흙빛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은 이미 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전시장을 우리 앞에 펼쳐놓고 있습니다.

 

 남도의 봄이 특별한 이유는, 이곳의 봄이 한 장면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도의 봄은 산과 들, 마을과 길, 바다와 바람이 함께 만들어냅니다. 어느 한 곳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길을 따라 걷는 동안 풍경이 계속 이어지고, 그 이어짐 속에서 봄의 깊이도 함께 쌓여갑니다.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남도의 봄은 그 꽃이 놓인 공기와 빛, 땅의 촉감까지 함께 보여주어 더 좋습니다. 그래서 남도의 봄은 한 점의 그림이라기보다 여러 폭의 그림이 천천히 이어지는 긴 전시에 더 가깝습니다. 

 

 생각해보면 봄은 늘 짧습니다. 그래서 더 곱고,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꽃은 기다려주지 않고, 바람도 붙잡아 둘 수 없고, 봄빛은 잠시 머물렀다가 어느새 초록으로 건너갑니다.
 

 그래서 오늘은 애청자 여러분들이 지금 남도에서만 즐길 수 있는 봄의 풍경화를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꼭 멀리 떠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혼자여도 좋고 둘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계절의 풍경은 어떤 화가의 팔레트보다도 섬세하고, 어떤 전시보다도 더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니 부디 이 봄을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올봄, 행복한 봄 전시의 추억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