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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깊다 ; #박수량 #백비(白碑)
남도는 깊다 3편 박수량의 백비(白碑)
- 조선 전기에 태어나 중종-명종대를 살다간 전남 장성 출신의 선비 아곡 박수량(1491-1554).
공부에 뜻을 세워 잇따라 고시(진사시, 별시문과)에 급제, 나주목사, 함경도 관찰사, 한성부판윤, 공조참판, 호조참판,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쳤다.
1554년 지중추부사로 재직 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그의 집은 비새는 초가집이었다. 상여멜 돈이 없었을 만큼 가난했던 세간살이. 죽기 전에 "날 위해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을 만큼 움켜쥘 것 없는 청류(淸流)의 삶을 살았던 박수량의 생애는 당시의 국왕 명종으로 하여금 상여멜 돈과 관원, 묘비를 하사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뒷산에 있는 박수량의 묘비는 흰 여백에 글씨 하나 없는 백비(白碑)다. 청백리로 사는 건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청류의 삶은 비슷비슷했을 것이다. 누리지 않고 나눠주고, 위를 올려다 보지 않고 아래로 눈길 주며 사는 삶. 30여 년의 관리 생활에서도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한 청백리.
현 정부에서 벌어지는 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에서 박수량 같은 인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 현대에 와서 청백리는 씨가 말라버린 걸까, 있어도 찾아내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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