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의견

광주문화방송 창사특집"전라도,유랑의 시대"를 보고.. 등록일 : 2004-10-17 00:00

호남에 대한 편견의 원인 5가지 들어가며 광주문화방송 창사 특집프로를 시청하고 하고픈 말이 많아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다. 먼저 이 프로를 보고 느낀 점을 몇가지 말하자면 호남인의 유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조명했다고 생각한다. 호남인이 차별당하게 된 근원이 경제적 빈곤과 군부독재정권 내지는 영남패권주의자들의 정치적 정략 떄문에 호남인에 대한 편견이 확대재생산됨으로서 차별의 골이 깊어졌다는 것을 정확히 짚어 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호남차별의 근원에는 정치적,경제적인 면을 제외하고도 역사적,문화적인 면들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문화적인 면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해결책을 찾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2부에서 언급되겠지만 1부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호남의 현재적,미래적위치는 과연 무엇인가를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호남의 현재적 위치가 과거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언급해내지 못한다면 지역민들에게 필요없는 패배주의와 피해의식을 쌓을 가능성이 크기에 우려된다는 말이다. 일단 2부를 기대하며 막고품은 말들을 해본다. "호남인에게는 방을 줄 수 없다." 지금이야 그 정도가 덜하고 주거형태도 많이 바뀌어 이런 황당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본인 또한 근래에 서울에서 2년간 직장생활하면서 하숙도 하고 그래봤지만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과거엔 심심치 않게 경험해 봤다는 호남사람들이 많다. 왜 저런 황당함을 호남사람들이 겪어야 했을까? 무슨 이유가 있었길레... 나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대학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지역패권주의에 관한 레포트가 주어졌다. 지역패권주의라? 머리에 털나고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관련 논문들과 서적들을 대출받아 쭉 훓어 보는데 한 논문을 읽고서 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지역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논문에서 전라도에 대한 타지역민들의 이미지를 접하고서 말이다. " 간사하다, 뒤통수를 잘친다, 뒤끝이 안좋다, 경박하다, 영리하다..." 지금도 선명하게 이러한 문구들을 기억하고 있으니 대학 초년생의 충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내 주변의 인정많고 선량한 사람들이 왜? 도대체 왜? 특히 경상도가 아닌 수도권 지역민들의 인식도 그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때 이후로 끊임없이 그 원인을 찾을려고 노력했다. 호남이 왜 저러한 참담한 편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 왔다. 내가 겪은 내 주변의 호남사람은 절대 그렇지 않음에도 억울한 편견속에 살아가야 하는 호남사람들과 우리들과 같은 황당한 경우를 우리 후손들은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이 나의 청년기를 지배했다. 이제서야 몇가지 원인을 나는 밝혀 낼 수 있었다. 그 원인들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한다. 1.왕건의 훈요십조와 이중환의 택리지 훈요8조에 따르면 "차령이남과 공주강 밖은 배역의 형세를 보이니 그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고 쓰여있다. 또 17세기 지리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호남인들은 간사하고 계집을 좋아하고 음주가무를 즐기며 학문에 힘쓰지 않아 이렇다할 인물이 없다."라며 독설을 퍼붓고 있다. 이렇게 고려시대 부터 시작된 호남에 대한 편견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고 조선시대에는 호남의 인재들이 피해를 본 것 또한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고려시대 떄는 왕건의 유훈에도 불구하고 호남출신들이 요직에 기용되지 못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근래에 밝혀지고 있다시피 훈요십조는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7대왕인 현종이 신라계인 최항등에 의해 옹립이 되었고 현종 또한 자신의 외가가 경주라며 신라계임을 자처했다. 이러한 정지적 상황속에서 신라계인 최항의 집에서 7대왕인 현종대에 와서야 훈요십조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신라계가 기존의 백제계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고려전반에 걸쳐 호남출신들은 요직에 많이 진출 했고 왕건 또한 자신의 고향이 나주라고까지 하며 호남인들을 중용했으니 훈요십조의 조작설이 정설임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훈요십조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해석상 차령이남과 공주강 밖(外)은 지금의 공주일대를 지칭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 車峴以南, 公州江外.."의 해석에 있어서 外의고려시대 때 쓰임새는 현재와 같은 '밖'의 의미가 아닌 '윗'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다. 공주일대의 여러호족집단들이 왕건의 고려창건에 반대하고 치열하게 대항했던 역사적 사실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 또한 이중환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씌여져 전혀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자신이 택리지에서 밝힌바와 같이 이중환은 전라도와 평안도를 한번도 가보지 못한 상태에서 전라도인들의 기질을 논하고 있다. 이중환은 당쟁이 겪화되던 시기의 인물로 사색당쟁의 와중에 전라도 출신에게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밀려남으로서 평생을 재야학자로서 보낸 인물이다. 즉, 자신의 개인적인 억하심정을 전라도 전체에 대한 증오로 표출한 것이니 학자로서 소양의 부족함을 드러낸 결과물이 바로 택리지의 호남폄하라고 보여진다. 이상과 같이 호남에 대한 기득권층의 왜곡된 편견도 호남차별에 대한 근거로서 작용하며 그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 현재처럼 언로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고 지역간 교통의 어려움이 많았던 조선시대이니 이러한 그릇된 편견을 고쳐지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2.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인한 호남인의 1차 엑소더스 도올 김용옥이 TV강의를 통해 동학이 경상도 경주출신의 최수운(최제우)이 창시한 이데올로기라며 자신의 친노무현,권력지향적인 행태에 대한 경상도의 불신을 희석시키려고 아부설레발을 치고는 있지만 동학은 전라도 농민들의 민중의식으로 인해 세상에 빛을 본 결과물임에 분명하다. 실천하지 못하면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민중을 도탄에 빠트린 외세와 수구기득권세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권을 행사한 민중혁명이었다. 그러나 외세와 양반기득권층 모두에 대립각을 세움으로서 양쪽 모두의 협공을 받아 실패하고 만다.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한 동학혁명은 전라도의 산하를 초토화시켰다. 또 많은 농민들이 관과 지주들의 핍박을 피해 경향각지로 유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치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장터의 각다귀로 또는 유리걸식하며 토착민들과 분쟁을 일으킨다. 이 떄부터 호남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호남학계의 정설인 듯 싶다. 광주광역시의 의뢰로 전남대 사회조사연구소에서 관련 연구를 진행해 나온 논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논문에 따르면 동학혁명이후 경기와 충청지역으로 많은 호남의 농민들이 유랑을 떠났고 그들로 인해 저들 지역에서 여러가지 사회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고 한다. 특히 교양을 갖추지 못한 하층민들이 대거 경기와 충청지역에 쏟아져 들어가 토착민들과 분쟁을 일으킴으로서 호남인들에 대한 기호 지역민들의 뿌리깊은 편견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동학혁명을 조선정부에 대한 변란으로 규정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민족을 위한 호남의 몸부림은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호남을 괴롭혀 왔다. 3. 박정희의 경부축 우선개발로 인한 제2차 엑소더스 박정희의 고향은 경북 구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가 자신의 고향 경상도만을 위해 경부축에 치우친 경제개발을 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경제대국으로 커가는 일본의 자본과 물자를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 경부축 개발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일정부분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3공과 4공을 통틀어 경상도에 비해 호남에 대한 인사차별이 이루어젔다는 것은 경부축 개발이 박정희의 영남지역주의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 또한 무시할 수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여하튼 경부축 우선개발로 인해 호남인은 상대적인 박탈감과 가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공산품을 사기 위해 호남의 농산물이 쓰여졌지만 그 값어치는 과거와 다르게 하락해만 갔다. 생활의 질이 하락함으로서 호남의 기층민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갈 수 밖에 없었고 서울로 부산으로 제 2차 엑소더스를 대거 단행한다. 호남인구의 절반 이상이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고향을 등지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의지할 곳 없는 타향..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러한 절박함이 동학혁명 이후 수도권지역민들에게 형성되어 있던 호남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키고 만다. 유학생들과 일부 엘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호남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식모,막노동,술집작부,중국집배달부,목욕탕 때밀이..등 사람들이 천대하는 직업들을 전전한다. 이들의 억센 호남사투리는 수도권지역민들에게 호남인에 대한 편견을 확립하는데 일조한다. 천박함이 호남의 이미지로 덧씌어지고 그들의 치열한 삶은 뒷끝이 안좋다라는 인식으로 전환되며 사람들의 입을 통해 확대재생산되고 만 것이다. 가난이 죄라면 죄가 되고 말았다. 만일 호남이 경상도처럼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타지역에 가서 아쉬운 소리 할 것 없고 그들과 부딫힐 일도 없다. 수도권에 유학한 호남지역의 엘리트들만이 수도권지역민들에게 호남인의 이미지로 형상화 되었을 것이니 호남에 대한 편견이 생겨날 리 없었을 것이니 가난이 죄라는 말이다. 4.전두환과 노태우정권의 호남상징조작 80년대를 통틀어 광주는 함부로 입밖에 낼 수 없는 화두였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항쟁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광주와 호남을 탄압한다.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호남대 비호남의 구도를 만들고 호남에 대한 상징조작을 자행한다. TV드라마에서 호남사투리를 쓰는 깡패,강도,식모,술집여자,사기꾼이 등장하고 호남의 정치인들은 빨갱이로 매도된다. 뉴스에서 보여지는 호남지역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데모는 남북한 대치상태라는 현실과 맞물려 체제불안선동이라는 이미지로 절묘하게 조작되고 언론 또한 일조한다. 호남지역의 살인사건은 신문 사회면의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 따라서 타지역의 일반국민들에게 있어 호남은 한마디로 말썽꾸러기이고 배역지역으로 인식이 고착화된다. 대기업은 호남출신들을 기피하게 되고 일반국민들 조차 사회적으로 그릇된 인식들과 정치적 흐름등이 맞물려 대놓고 호남을 욕해대는 경우를 호남출신들은 당하게 된다. 정권과 기업체,사회전반적인 기피는 호남차별의 정도를 더하게 되고 확대재생산된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암흑의 시대였다. 군사독재정권의 정권유지를 위해 호남은 철저히 기만당하고 만 것이다. 5.짠함의 문화와 깍쟁이 문화의 충돌 전라도 사람끼리는 서로 뒤끝이 않좋다는 말을 안한다. 호남인들의 대동의식때문이다. 즉, 역사적으로 농경사회인 호남에서 대부분 소작인으로서 대지주들의 폭압에 고통당하던 호남사람들에게 싹튼 대동의식은 서로 불만이 있더래도 참고 넘어가는 '짠함과 믿음'의 문화를 보여왔다. 그래서 호남인들은 불만이 있어래도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상대방이 그점을 알아줄 때까지 참고 인내하는 인성을 지녔다. 그런데 다른 지역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토착민들 특히 수도권 사람들의 문화와 충돌을 일으켰다. 수도권 사람들은 불만이 있으면 바로 이의제기를 하고 자기 밥그릇챙기기를 잘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팔도민이 몰려있는 수도권에서 살아갈 수 없기에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수도권의 깍쟁이문화를 탓할 일은 아니다. 환경결정론을 난 신뢰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래서 서로간에 문화적인 충돌이 생기고 만 것이다. 수도권사람들 입장에선 호남인들이 아무런 말 안하니 불만이 없는것 같은데도 나중에 보면 팩하고 배신때리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고 호남사람들 입장에선 상대방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몰라줘도 너무 몰라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권 사람들이 생각하는 '배신'을 때리게 되는 것이고...한마디로 문화적인 차이점 때문에 그러한 인식들이 싹튼 것이란 말이다. 하숙집 주인의 시도 떄도 없는 인정머리 없는 까탈스러움에 마음만은 여유롭고 인정넘치게 살았던 전라도 학생들이 뒤끝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나는 호남출신의 유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자 한다. "불만이 생기면 즉각 이의를 제기하고 제 밥그릇을 챙겨라..서울이란 천만도시에선 이것이 살아남기 위한 절대선이다.."라고 말이다. 맺으며 이상과 같이 호남인에 대한 편견의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여러가지 그릇된 인식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호남인인 글쓴이의 주관이 개입될 수도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호남에 대한 편견에는 수구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심산이 호남을 편견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는 말이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과 민주화는 호남에 대한 편견의 굴레를 서서히 벗기고 있다.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 사람들은 지역을 뛰어넘어 서로간에 소통을 하며 타지역에 대한 편견의 그릇됨을 인식하고 있다.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상징조작된 호남의 네거티브적 이미지가 서서히 고쳐지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호남이 권력을 잡음으로서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경상도일방지배의 역사적 철옹성이 제거되어 언제든지 호남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짐으로서 호남차별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했던 호남불임의 역사가 사라졌다. 즉, 호남차별의 궁극적 근원을 제거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사회적인 편견이다. 뒤끝으로 이야기 되는 호남인들의 기질에 대한 오해를 어떻게 불식시킬 수 있는가인데 결론은 경제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즉, 호남지역의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는 것이 저러한 편견의 싹을 잘라낼 수 있다는 말이다. 호남의 경제가 활성화되면 타지역으로 떠날 일이 없을 것이고 아쉬운 소리 할 것도 없으며 허드렛 일을 하며 천대받을 일도 없다. 즉, 부딫일 일이 없다는 말이다. 자기 지역에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경제,문화적으로 윤택해 진다면 호남인들이 타지역에 나가 업신여김을 당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호남의 훌륭한 문화만이 타지역에 노출이 될 것이다. 공장노동자로 자기지역으로 하층민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경상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호남경제의 부활만이 호남에 대한 마지막 남은 억울한 편견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댓글(1)
  • 2004-10-17 00:00

    어제 저녁 '전라도' 제 2부를 보고 나서 <br/>
    <br/>
    이 지역의 한 시민이자 자긍심있고 올바른 정체성을 가져야 할 <br/>
    <br/>
    학생으로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br/>
    <br/>
    어려서부터 어른들께서는 전라도는 가난하고 마땅히 할것이 없으니<br/>
    <br/>
    공부 열심히해 서울로 가 어떻게 해서든 <br/>
    <br/>
    성공하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br/>
    <br/>
    나이가 들어 윗지방에서 학교를 다니고 또 군대를 다녀와서는 어른들의 말씀을<br/>
    <br/>
    더욱 더 절실히 공감합니다.<br/>
    <br/>
    당장 번화가를 나가도 활기가 없고 몇년 전 모습과 달라진 점이 별로 없는 것이<br/>
    <br/>
    사실입니다. <br/>
    <br/>
    그만큼 투자와 개발이 활발치 못하다는 것입니다.<br/>
    <br/>
    물론 전국적인 불황의 그림자때문이라는 상황을 고려하지만 <br/>
    <br/>
    8개 광역시 중에서 가장 힘든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br/>
    <br/>
    지역민들의 자긍심 결여와 생활고등이 오랜 문화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고장<br/>
    <br/>
    의 안타까운 현실일것입니다.<br/>
    <br/>
    하지만 항상 가장 어두운 시기는 태양이 밝아오기 직전이라는 말처럼 <br/>
    <br/>
    우리에게도 희망이라는 등불이 있기에 21세기 정보와 문화관광의 시대에 <br/>
    <br/>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져 봅니다.<br/>
    <br/>
    전라도 화이팅 ~~<br/>
    <br/>
    <br/>
    <br/>
    <br/>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