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현의 시선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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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인터뷰]국립나주박물관 개관 의미와 발전 방향(박중환 학예연구관/국립중앙박물관)

■ 방송시간 월요일~금요일 AM 07:30~08:57
■ 기획 김민호
■ 연출 황동현
■ 작가 최은영, 박소희
■ 진행 황동현

◇ 황동현 진행자 (이하 황) - 2000년 시간 여행의 출발점. 나주 반남면 국립나주박물관이 지난 2013년 11월 문을 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산하의 지역 박물관으로는 12번째인데요. 외형은 마한 문화권의 중심지답게 고분에서 출토된 옹관의 형성을 하고 있고 박중환 관장이 초대관장으로 지금까지 국립박물관이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오셨습니다. 개관 업무를 맡았던 박중환 관장은 이제 나주를 떠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습니다만 나주박물관의 기능과 위상을 키워낸 수장으로서의 성과 그리고 또 그분에 대한 그리움은 분명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박중환 학예연구관, 오늘 모시고 관련 이야기 나누어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박중환 (이하 박) - 네, 안녕하세요.
◇ 황 – 국립나무박물관 개관이 갖는 의미, 학예관께서도 이 국립나주박물관 개관을 정말 오랫동안 총괄해 오셨는데요. 의미부터 한번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 박 – 네, 우리 지역에 두 번째로 문을 연 국립박물관이었습니다. 요즘은 국립이나 공립 또 대학 사립박물관들이 꽤 많이 들어서있습니다만 그래도 국가에서 세운 박물관으로서 우리 지역의 두 번째, 광주박물관에서 두 번째 문을 열었고요. 광주박물관의 경우는 신안 앞바다에서 나온 중국 도자기 때문에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세워졌던 데에 비해서 나주박물관은 우리 지역 사회에서 우리 지역 사회의 독특한 문화적인 특징을 저명하기 위한 기관이 필요하다, 이런 요구를 해서 그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우리 지역 사회의 요구에 의해서 세워진 문화기관.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황 – 국립나주박물관, 이 마한의 문화가 또 재조명되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 박 – 네, 그렇습니다. 마한의 문화는 이제 과거부터 우리 지역의 독특한 옹관고분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었지만 옹관고분 출토유물들을 모은 국립나주박물관이 개관을 하면서 좀 더 우리 지역 사회가 우리 지역 고유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그리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황 – 마한, 이 마한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시죠.
◆ 박 – 네, 일반적으로 마한 그러면 영산강 유역에 백제하고 다른 옹관묘라고 하는 이 고분으로 특징지어지는 고대 문화라고 이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데 대개 보통 사람들이 마한 그러면 사실 굉장히 까마득하게 그렇게 느껴지고 실체가 좀 뚜렷하게 와 닿지 않는 그런 느낌을 많이 갖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고대에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해 있었지 않냐, 이런 이해가 이제 많아왔었는데요. 그렇지만 백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은 백제의 중심은 서울에 좀 일정 기간 있었다가 공주라든가 부여 또는 늦게는 전라북도 익산까지가 백제의 중심 문화라고 할 수 있고 백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영산강 유역, 전라남도 지역은 사실은 변방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백제 이전에 우리 지역이 여태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가 한 번도 역사의 중심이라든가 한 나라의 왕도라든가 이러한 경험이 없었던 지역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게 아니라 과거에 삼국시대 이전에 있었던 문화 중에서 이 지역이 한반도의 어떠한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던 그런 시대가 있었던 거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관심을 갖게 된 문화고요. 그렇게 보다 보니까 삼국시대에는 결국은 변방으로 전락을 했지만 그 앞선 시대인 삼한시대에는 여기가 마한의 중심이었고 마한이라고 하는 나라는 결국 삼한시대에 마한, 진한, 변한 중에서 또 중심적인 그런 나라였기 때문에 여기가 마한의 중심이라면 삼한시대에는 영산강 유역이 우리 한반도 남부 일대의 중심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던 지역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관심과 이제 관점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된 문화입니다.
◇ 황 –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결국은 백제 중심의 역사 속에서는 이 영산강 문화권이 변방일 수도 있지만 마한이라고 하는 그러한 역사를 생각하게 되면 고대 왕국이고 직접 왕이 다스렸던 이런 국가에서 중심이었다, 그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 박 – 네, 그렇습니다.
◇ 황 – 그래서 이 영산강 문화권, 바로 이 호남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이 바로 마한일 텐데요. 학예관님께서 이렇게 마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어디에 있으시죠?
◆ 박 – 대단히 일반적인 것이고요. 대개 고대역사는 중세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연구자들이 자기가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를 선택할 때 우선은 인연을 갖게 되는 게 자기가 태어난 지역과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고대 역사의 연구 주제를 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 충청도나 전라도, 서울지역에서 태어난 학생들은 고대사를 공부해도 백제를 공부하고 경상도나 경상남도 또 이런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신라를 공부하고 이러한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속해 있는 전라남도는 백제인가, 이러한 의문점들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고요. 그래서 정말 백제가 아닌 이 지역만의 고유한 정치체는 무엇인가 이런 부분에 대한 관심에서 마한에 대한 공부를 대학원 때부터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 황 – 마한을 통해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이 마한과 만나고 또 마한에 대한 관심을 더 깊게 가지시게 된 거네요.
◆ 박 – 네, 그렇습니다.
◇ 황 –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 백제 문화권과는 다른 분명한 차이가 있는 이 마한의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는 말씀이신데요. 백제 문화권과 이 마한 문화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 박 – 연구자에 따라서 견해의 차이가 좀 남아있는 부분이기는 한데요.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간 시기가 상대적으로 빠르지 않다. 그러니까 서력기원으로 보면 500년대까지도 이 지역이 토착적인 정치권력과 고유의 문화가 남아있었다고 하는 그러한 학술적인 주장들이 요 근래에 들어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지역이 백제에 속해 있었던 시기는 백제가 660년에 망했기 때문에 사실은 뭐 150년 남짓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고 그리고 이 지역에 남아있는 백제 고유의 문화라고 하는 것을 조금 뚜렷하게 추출해 내기 어려운 것도 그것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직접적으로는 우리 나주 반남이라든가 나주 다시면이라든가 영암 시종면 일대를 중심으로 해서 분포되고 있는 고분군이, 그 고분군의 형태가 백제의 석실본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이런 게 직접적인 근거가 될 거고요. 그리고 이제 우리 가까운 전라남도뿐 아니라 광주 신창동에서 출토된 기원전후 무렵의 다양한 생활 문화, 여러 가지 수없이 많은 생활 용품들이 나왔습니다마는 그러한 것들이 이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와 있는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이거든요. 우리 2000년 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의 문화가 백제 문화 이전에 있었던 삼한 문화 또 이 지역으로서는 마한 문화 내에 해당되는 것인데. 그럼 백제보다는 훨씬 더 연원이 올라가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공주, 부여, 익산 지역에서는 백제 문화와는 현격하게 형태라든가 기능이라든가 성격, 재질 모두가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 황 – 결국은 마한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우리 영산강 문화권, 더 알 수 있을지 않을까 싶고요. 그러한 과정들을 직접 찾아가고 또 그런 유적, 유물들을 모으는 과정들. 국립나주박물관 개관과 함께 우리 관장님께서 해 오셨는데. 국립나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적들, 어떤 것들이 대표적인 게 있습니까?
◆ 박 – 우선 나주박물관은 가서 보시면 가장 중심 되는 부분이 무덤 안에 들어있는 옹관입니다. 그리고 이제 옹관에서 출토된 다양한 장신구들, 금동관이라든가 금동신발이라든가 이런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게 중심 전시품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리고 유적으로서는 방금 말씀드렸었던 옹관묘를 안데 안고 있는 그러한 영산강 유역의 그때 고분들, 이게 이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광주 신창동 유적 일대에서 출토된 나무로 만든 목재 현악기라든가 또 여러 가지 나무로 만든 목재 생활 도구들,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마한 단계의 문화재들이고 나주박물관의 중심 소장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황 – 이 소장품들, 지금 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이런 유적들이 또 일제강점기 시절을 거치면서 훼손도 좀 많이 됐다고 그러던데, 그런가요?
◆ 박 – 네, 그렇습니다. 이제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나주 반남 고분군이 발굴이 되기 시작했었던 것이고요. 그러다 보니까 그 전까지는 이 고분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분이라고 하는 것은 뭔지 모르지만 오랜 옛날에 사람이 묻혔던 무덤이었다는 그런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훼손하면 행익을 당한다, 말하자면 토부의 대상이 됐던 것이죠. 그래서 누구도 의도치 않게 무너지거나 의도치 않게 파괴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도굴을 한다든가 이러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1917년도에 조선 총독부 조사단에서 발굴을 일주일 동안 하면서 신촌리 고분의 금동관을 비롯해서 많은 유물을 발굴을 해서 그걸 싣고 경성에 있는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올라가버렸었죠. 그것을 이제 지켜본 겁니다, 이 지역 사회 사람들이. 그렇다 보니까 그것을 파도 아무런.
◇ 황 – 문제가 없나 보다 이렇게 생각한 건가 보죠?
◆ 박 – 문제가 없나 보다, 재앙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속에서 왕관이 나왔다 더라. 신촌리 고분의 금동관 이야기죠? 이렇게 소문이 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이제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17년 12월 달에 지금으로부터 101년 됐습니다마는 그 발굴이 끝나고 나서 무차별적인 도굴이 이제 일어나게 된 겁니다. 그때 뭐 지금과 같이 문화재 보호법령이라든가 보호기관도 없었던 때이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도 도굴에 아마 참여했을 것이고. 아무튼 그 보호되지 않은 상태에서.
◇ 황 – 많이 유실되고 또 훼손되고 그랬었겠네요?
◆ 박 – 그리고 이제 서울로 올라갔었던 당시에 발굴된 유물들이 6.25 한국전쟁 때 또 일정 부분 피폭당해서 깨지고 없어진 토기편들이 있죠. 지금도 중앙박물관에 일제 시대 때 유물 보내는 6.25 왕실유물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때 이제 폭탄의 피해를 받아서 그때 경북궁 근정전의 회랑이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수장고였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전쟁의 피해를 입은 것도 상당히 있습니다.
◇ 황 – 그래서 이런 모든 유물들, 지금 역사적으로 많이 갖고 있는 의미도 이야기를 들어봤고요, 관장님으로부터요. 또 여러 가지 마한의 유물들 이야기도 좀 들었는데요.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국립나주박물관이 지금 개관을 했던 거 아니겠습니까?
◆ 박 – 네.
◇ 황 – 그리고 그 개관 업무를 우리 관장님으로서 총괄을 해 오셨는데. 굉장히 좀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이런 개관 업무를 총괄하시면서 어떤 점이 제일 어려우셨어요?
◆ 박 – 한두 가지가 아니었었죠. 어려움은 수없이 많았었는데. 이제 가장 큰 것은 결국은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지역의 고유한 독특한 문화를 마한 문화 아니면 크게는 삼한 문화라고 하는 것을 이 지역의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대중의 관점을 이렇게 바꾸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 황 – 생각을 변화시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인데요.
◆ 박 – 그러니까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게 나라의 역사도 있지만 또 다양한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자기 가문의 역사도 있고 개인의 역사도 있고요. 그리고 지역의 역사도 있는데. 우리 지역의 역사를 볼 때는 나라의 역사를 바라볼 때 하고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되는 겁니다. 그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를 봐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나주박물관 개관을 중심으로 해서 마한 문화를 연구하고 알리자고 하는 노력을 하면서 부딪치는 많은 어려움은 이 지역의 역사를 공주나 부여의 입장에서 여기를 바라보는 겁니다. 관점을 여기를 중심으로 보지 않는 것이죠.
◇ 황 - 우리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처럼 본다는 얘기신가요?
◆ 박 - 타인의 부속된 이야기로 우리 지역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시각과 관점이 우리 지역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이게 타성화 돼 있어서 그래서 우리가 중심이 된 역사를 이해하고 가꾸고 보존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이 사실은 쉽지 않았었던 그런 기억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생각납니다.
◇ 황 - 인식의 부딪힘 과정이 쉽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지금 국립나주박물관은 전국적으로도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개성이 있는 박물관으로 지금 알려지고 있고 그런 어떤 노력의 중심에 바로 관장님이 계셨는데요. 관장님께서 이만큼 키워온 국립나주박물관, 자랑을 좀 하신다면 어떻게 자랑을 하실 수 있을까요.
◆ 박 - 네, 나주박물관은 광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이제 농촌 지역의 벌판에 있어서 사실 접근성이 굉장히 좀 쉽지가 않습니다. 접근성이 좋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혼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지역 사회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 저희 동료들, 또 후배들이 애를 써서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은 보란 듯한 그런 박물관으로 이제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른 박물관에서 시도하지 않고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땀 흘려서 지금 하고 있고 예를 들자면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경우도 단순히 낮 시간에 박물관에 찾아와서 보고 집으로 가는 그런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박물관에 와서 1박 2일 동안 하룻밤을 지내면서 캠핑을 하면서 자연도 체험하고 역사도 체험할 수 있는 이런 프로그램도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금 시도를 했고요. 그리고 이제 지금은 박물관 분야의, 박물관 동네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만 전시실만 보는 게 아니라 수장고까지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수장고 안에서 박물관에 들어온 소장품들을 정리하고, 등록하고 보존 처리하는 그 모든 작업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열린 유물 정리실 같은 곳들도 운영을 하고 있고 또 머지않아서는 올 아마, 11월 무렵일 것 같습니다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총어라고 하는 로봇이 등장해서 박물관의 전시실을 소개하는 새로운 전위적인 실험을 하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실은 그 어느 것 하나 우리나라 박물관계의 최초의 사례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아마 이러한 것들을 주의 깊게 보신다면 이 박물관이 멀리,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전원에 있지만 이 박물관이 가진 새로운 가치와 그 실험적인 시도들의 의미들을 오시는 분들이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 황 - 이런 기획들을 통해서 박물관이 좀 더 앞서 나가는 박물관으로 지금까지 우리 관장님께서 만들어오셨는데 전시도 또 다양한 기획을 해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 박 - 이제 박물관이 문을 열고 곧 5년째 되는 아직은 역사가 짧은 박물관이었기 때문에 전시횟수가 아마 10년, 20년 있었던 박물관보다는 아직 많지 않지만 우선은 우리 전라남도 서부지역에 있는 시군들과 서로 협력한 전시들을 추진해 왔었습니다. 나주 역사를 조명하는 전시라든가 영암의 역사의 조명하는 월출산과 같은 전시, 또는 완도의 역사를 조명하는 특별전 완도. 이런 전시를 했었고요. 올 봄에는 우리 지역 출신의 임진왜란 때 활약했었던 장군, 최희량이 장군이 쓴 임진왜란 때의 승전 보고서, 승전 보고서를 소개하는 그런 호남의 임진왜란, 그 승리의 기록이라고 하는 그런 전시를 기획 했었던 것이 아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 황 -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더 느끼는 부분이 결국은 마한을 매개로 해서 다양한 역사적인 유물들, 이런 부분은 전시되어 있지만 결국은 우리 뿌리, 호남. 이 영산강 문화권의 뿌리를 찾아가는 그런 다양한 전시를 또 해 오셨네요, 관장님.
◆ 박 - 네, 그렇습니다.
◇ 황 - 이 부분들, 다양한 콘텐츠, 전시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박물관의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이제는 또 중앙으로 옮기시게 됐는데요. 국립나주박물관, 어떤 박물관으로 더 성장하기를 바라십니까?
◆ 박 - 이제 박물관은 우리 사회 안에서는 작은 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박물관은 역사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주는 타임캡슐 같은 그런 역할을 하는 공간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주박물관을 통해서 우리 지역 사람들이 우리 지역 문화의 뿌리, 그리고 나의 뿌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기관으로 이 박물관이 역할을 해 주고 성장 했으면 좋겠고요. 또 하나는 지금 나주 반남 지역이라고 하는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 고분군이 지금 30개 정도가 분포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고분군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적은 아직 발굴이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물관이 앞으로는 그 활동 영역을 넓혀서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반남 고분군 주변 일대를 비롯해서 고대의 마한사람들이 살았었던 마을이라든가 또 행정 중심지라든가 이와 같은 생활 유적들도 드러낼 수 있는 발굴과 조사와 학술 연구가 다양하게 어우러지는 그런 박물관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희망을 갖습니다.
◇ 황 - 그리고 하나 더 여담으로 여쭤보고 싶은 게요, 관장님.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정말 나주박물관의 개관 업무 그리고 이외 이렇게 성장을 시키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시간, 그리고 가장 또 아쉬웠던 부분도 있으실 것 같아요. 어떤 부분들이었을까요?
◆ 박 - 여러 가지 많이 있습니다만 나주가 갖고 있었던 소중한 문화재 중에 하나인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사찰에 세워져있던 석등이 있습니다. 나주 서문 근처에 있었다고 해서 나무서문석등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는데 그 석등을 중앙박물관이나 문화재청을 설득을 해서 이 나주박물관으로, 나주 현지로 다시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요. 이제 그게 가장 보람 있었던 일 중의 하나로 기억이 되고요. 아쉬웠던 것이라면 결국은 이제 막 출발한 박물관이기 때문에 아직은 전시 공간이라든가 여러 가지 부속시설 같은 것들이 좀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확충을 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었는데 결국은 아직은 문을 연 지 5년도 안 된 박물관이라는 이러한 평가 때문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국회에서 예산을 따는데 그것을 성취를 하지 못해서 지금 또 미뤄졌는데. 그런 것들을 좀 성사를 시켰더라면 지금 본관과 함께 별관이 들어서서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을 텐데. 그 부분이 좀 아쉬움으로 느껴지고 기억에 남습니다.
◇ 황 - 앞으로 더 많은 또 일을 중앙에서 하실 것으로 기대가 되는데요. 앞으로 계획도 이야기 해 주시죠.
◆ 박 - 네, 제 개인적으로 또 여러 가지 못했었던 나주에 5년 동안 내려와 있으면서 못했었던 서울에서 활동들은 정말 또 많은 일이 있을 것 같고요. 그렇지만 제 개인적인 그런 또 계획보다는 저는 또 서울에서 늘 또 나주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자주 또 와서 나주박물관이 성장하고 우리 지역 사회에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늘 기대하고 또 좋은 소식들이 들려오기를 또 기다리면서 또 생활하겠습니다.
◇ 황 - 네, 청취자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말씀 해주시죠.
◆ 박 - 청취자 여러분, 감사하고요. 그동안 정말 척박한 그런 환경에서 출발한 문화기관 하나를 제대로 자리 잡게 할 수 있도록 거의 지금 100만 명 가까운 많은 분들이 나주박물관을 찾아주셨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드리고 여러분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박물관이 지금과 같이 자리를 잡았듯이 앞으로도 더 발전해서 더 큰 우리 지역의 문화적인 그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 많이 찾아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 고마웠습니다.
◇ 황 - 그동안 참 많은 성과를 이루어주셨고요. 또 그러한 성과 지역민들이 꼭 기억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 박 - 네, 감사합니다.
◇ 황 -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박중환 학예연구관과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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