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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인터뷰]"광주의 정체성 바로 세워야.."(김종배/민주평화당 광주시장 후보)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최은영
■ 진행 황동현 PD
◇ 황동현 진행자(이하 황) - 민주평화당이 6.13 지방선거 광주시장 후보로 김종배 전 국회의원을 확정했습니다. 광주시장 선거. 더불어민주당 이용섭 후보, 민주평화당 김종배 후보, 정의당 나경채 후보. 그리고 민중당 윤민호 후보 이렇게 4파전으로 치러지게 됐는데요. 김종배 후보는 5.18 시민군 총위원장 출신으로 그 어느 때보다 5.18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들이 높은 요즘 상황 속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 점쳐지는 선거 구도에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평화당 김종배 광주시장 후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김종배 (이하 김) - 안녕하세요.
◇ 황 - 2부에서 안병하 치안감 가족에게 광주시가 지급된 5.18 보상금 환수를 요구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요. 그 내용은 좀 들으셨죠?
◆ 김 - 조금 들었습니다.
◇ 황 - 이런 부분들. 어떻게 보면 광주를 위해서 희생당한 분들에게 광주시가 보상금 환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인데. 그런 것들을 보시면서 5.18 현장에 계셨던 분으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김 - 우리 안병하 경찰국장께서는 5.18 당시에 계엄군들에 의해서 광주 시민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광주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고 해서 거부하고 경찰들을 광주시에서 전부 다 외곽으로 퇴진을 시켰었는데. 그 이후에 많은 고문과 어려움 속에서 지내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광주시에서 그분에 대해서 배려하고 보상해야 한다고 봅니다.
◇ 황 - 광주시에서는 마음은 있으나 행정 행위의 한계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국은 그런 한계를 좀 극복해서 광주시 차원에서 적극적인 방안을 만들어야 하는 노력은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 김 - 시에서 행정적인 문제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양반이 그 당시에 5.18에 했었던 것은 우리 공무원 출신들에게는 굉장한 귀감이라고 저는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시청에서 못하면 시민들 모금이라도 해서 그분에게 보상을 해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집니다.
◇ 황 - 그런 부분들. 여러 가지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상황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광주가 직접 나섰던 게 5.18이고요. 그 5.18의 현장에 우리 후보님이 계셨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를 좀 나누면 좋겠습니다. 민주평화당 광주시장 후보로 출마를 하시게 됐는데 출마를 결심하시게 된 이유부터 들려주시겠습니까?
◆ 김 - 사실은 민주평화당의 지도부인 조배숙, 대표 천정배 의원, 정동영 의원님 등 여러분들께서 사실은 광주시장 출마를 여러 차례 권유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너무 갑작스러운 요청이라서 일단 거부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시간도 너무 없고. 여러 가지로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주변에 많은 분들이 5.18의 항쟁 정신이 광주 정신으로 승화되어 있는데 광주 학살의 원흉이었던 전두환 정권에 협력한 사람이 어떻게 광주시장이 될 수 있냐,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서울시장 후보, 경기지사 후보 등이 시민운동 내지는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민주당 후보로 공천이 되었는데.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는 광주시장이 전두환 정권 핵심인 청와대의 핵심 부서인 사정비서실에서 근무한 사람을 어떻게 광주시장으로 후보를 내놓을 수 있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어요. 저도 마지막으로 그거에 대해서 공감했습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광주의 정체성 확립과 광주 정신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최종적으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 황 - 광주의 정체성이 확립된다는 말씀을 하셨고. 결국 전두환 정권의 협력자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하신다면 지금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대한 이야기이신가요?
◆ 김 - 그렇죠. 아마 광주시장 더불어민주당 후보인 이용섭 후보를 지칭할 수도 있죠. 제가 광주시장 후보로 나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황 - 왜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방금 이야기하신 것처럼 광주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된다.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광주의 정체성을 우리들이 가져가야 할 그런 이유들. 그다음에 방금 이야기하신 이용섭 후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런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부분들. 더 구체적으로 한번 이야기를 해 주시죠. 어떤 의미신가요?
◆ 김 - 광주는 사실 아픈 과거가 있잖아요. 5.18의 정말 시민 학살이라는 그 아픔을 갖고 있는데. 지금까지 광주는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때 당시에 숭고한 항쟁 정신. 공동체 정신. 이런 것들은 정말 우리가 역사에 길이 우뚝 세워서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최소한 광주시장 만큼은 광주 정신의 DNA가 있는 사람이 시장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소망 때문에.
◇ 황 - 광주 정신은 결국은 5.18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 김 - 그렇죠.
◇ 황 - 우리 후보께서도 5.18 당시 시민군 총 위원장으로 활동하셨고 신군부의 악랄한 그런 진압과정에서 저항을 하셨는데. 5.18 정말 38주기.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후보로 나오시면서 더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 김 - 네, 그렇습니다. 너무 감회가 새롭고요. 참 이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아픔과 처절함을 어떻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5월 항쟁 기간.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와 슬픔을 반복하면서 그 당시에 투쟁했었습니다. 신군부의 무차별한 잔인 학살로 난리통이였잖아요. 우선 그 당시에 사망한 시신들을, 관도 없었어요. 입관부터 해서. 가족들을 확인시키고. 확인된 사람은 상무관에 안치시키는 작업을 제가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총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치안 부재 상태였어요. 자체 치안유지팀을 만들어서 강도 한 건이 없는 정말 아름다운 광주 항쟁을 저희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가지 한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때 당시 시민들이 여름도 되고 그래서 어려웠어요, 보관하기가.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구용상 시장하고 저하고 둘이서 만났습니다. 장례식을 우리가 시민장부터 치르자 해서 합의를 했었는데. 27일로 시민장을 치르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용상 시장하고 저하고 공동으로 장례위원장을 맡고 시민장을 치르기로 했는데. 27일 새벽에 계엄군들이 진압을 해서 결국은 장례식을 못 치렀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 한이 남아 있어서. 정말 내가 시장이 된다면 이런 한을 풀고 시민장으로라도 한번 치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그런 소망들이 그동안에 있었습니다.
◇ 황 - 지금 후보님,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시장과 27일에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를 치르기로 했는데 신군부는 바로 27일 새벽에 도청 진압작전을 실시한 거네요?
◆ 김 - 네,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례식 일정을 잡아놓고 장례를 못 치렀어요. 그게 지금 굉장히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 황 - 그런 상황들이 실질적으로 시장과 합의가 된 사항이기 때문에 신군부의 상층에 보고가 됐을 텐데. 그런 것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압작전을 개시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 김 - 제가 봤을 때는 5월 25일 저녁부터 우리들이 투쟁위원회로 다시 재결성를 했어요, 항쟁지도부로는. 그래서 조직적으로 좀 투쟁할 태세를 갖추었는데. 그런 시민장하고도 맞물려있고 그래서 26일에 자정을 넘기고 27일 새벽에 계엄군들이 저는 진압했다고 보고 있어요.
◇ 황 - 우리 후보께서는 그래서 또 5.18와 밀접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5.18 사형수라고 불리기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5.18 사형수, 이렇게 불리시게 된 연유도 좀 이야기해 주시죠.
◆ 김 - 5.18 사형수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저희들이 마지막에 도청 안에서 한 200여 명이 남아 있었어요. 한 400~500명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계엄군들이 들어온다고 그래서 한 절반 정도가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200명들이 남은 총기들을 들고 지켰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군인들이 3공수 여단, 7공수 여단, 11공수 여단, 박준병 20사단, 31사단, 전투교육사령부. 이 팀들이 합동으로 현대 무기를 들고 작전해 오는데 우리는 카빈소총을 들고 한 200명이 저항을 했어요. 독 안에 든 쥐였고 굉장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때 17명이 죽었어요. 그 과정에서 군인들이 들어온다고 그러니까 저희들끼리 논의를 했는데 여기서 투쟁할 수 있는 사람만 남고 자신 없는 사람은 집에 돌아가라고 했는데 200명 남았습니다. 그리고 온건파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더 이상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투항하고 나가자고 주장했는데. 저는 우리의 요구사항이 하나도 관철되지 않고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지금 매도하고 있는데 사과 한마디도 받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총을 반납하고 투항할 수 있어요 하고 저는 끝까지 주장했었던 강경파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했으면 17명이 안 죽었을 거예요. 그 현장에서 17명이 죽었는데. 그 17명의 죽음이 우리 광주 정신이라고 저는 봅니다. 불의에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투쟁하는 정신, 이게 저는 광주 정신이라고 보고 있어요.
◇ 황 - 그래서 이후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 선고를 받으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 김 - 네, 그렇습니다. 그 이후에 체포돼서 돌아가신 분들은 거기서 돌아가시고 나머지는 체포됐어요. 그래서 3부대 영창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재판을 받았는데. 군대재판에서 변호사라는 사람도 우리가 선임을 못 했어요. 취재하는 사람도 들어와서 사진 한 컷도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외로운 재판들을 받으면서 그때 군사법정에서 제가 사형을 선고를 받았습니다.
◇ 황 - 이런 과정들. 그때 80년의 절절한 기억들을 가지고 광주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광주시장에 나오셨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데요. 15대 총선 때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입문하셔서 정치 활동도 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알려주시죠.
◆ 김 - 저는 사실 정치는 조금 빨리 시작했어요. 과거에 양 김씨 후보 단일화 문제로 제가 그때 참여를 해서.
◇ 황 - 87년인가요?
◆ 김 - 네, 그렇죠. 그 뒤에 정치권을 지켜보다가 제가 국회에 입문하게 된 거는 15대 때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비례로 제가 입문했습니다. 그때 제가 전국구 14번을 받았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그 당시에 15번을 받아서 배수진을 쳐주셨어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그때 떨어지시고 14번 저까지만 마지막으로 붙어서 제가 의정활동을 했습니다, 15대 때.
◇ 황 -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도 굉장히 깊으시네요.
◆ 김 - 네.
◇ 황 - 또 정치를 떠나서 한 20년. 여러 가지 정계를 떠나서 보내신 것 같은데요. 그동안 이후에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도 소개 좀 해 주시죠.
◆ 김 - 사실은 정치를 재개해 보려고 시시탐탐 봤었어요. 그런데 계기를 못 만들었습니다, 사실은. 그러다가 개인 일도 좀 하고 그러다 보니까 한 20년 지났어요.
◇ 황 - 이제 본격적으로 다시 광주 정신을 살리는 그런 차원에서 광주시장으로 출마를 하셨다고 말씀을 하셨고 그런 이야기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선거 이제 한 달 남았습니다. 얼굴도 알리셔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선거 준비, 굉장히 바쁘실 것 같은데 어떻게 하루하루 지금 보내고 계십니까?
◆ 김 - 저도 정신이 없어요. 제가 처음에 시장을 나가겠다고 준비한 사람도 아니고. 민평당에서 요청해 와서 사실 제가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또 준비도 안 되어 있고. 또 광주시장 정도라면 상당 기간 동안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제가 고사했었어요. 그러나 여러 가지로 상당히 중요한 시기라는 판단을 제가 했습니다. 정말 광주의 정체성과 5.18의 항쟁 정신을 우리 역사 속에서 뭔가 좀 자리잡고 우뚝 세워야 된다는 그런 사명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결심하고 이번에 나왔습니다.
◇ 황 - 일부에서는 이런 말도 하거든요. 행정 경험이 없으시다. 광주라는 이 140만 도시를 이끌어가기에는 역량 부족 아니냐, 이런 지적도 나오던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답하실 수 있으세요?
◆ 김 – 저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사실 국회의원 한 번 하면 국정 메커니즘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또 국회의원의 기능이라는 것이 국정 감사도 하기 때문에 행정부의 기능들을 다 할 수가 있고. 입법 활동도 하잖아요. 그래서 국회의원을 한 번 정도 하면 나는 최소한 국정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거는 문제가 없고요. 지금 요즘에 보면 공무원들이 굉장히 우수한 인력들이 들어오더라고요, 말단들 보면. 그 우수한 인력들. 그리고 행정고시 합격해서 20, 30년 동안 공직에 계신 분들 있는데. 그분들의 행정 능력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시장은 행정 기술을 보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균형감각이 있고 종합적인 판단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해야 된다고 봐요. 그래서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걱정을 안 하고요. 정말로 말단 공무원들이 아이디어와 안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해서 마지막으로 시장이 검토하고 결정하는 그런 공직사회 민주화를 한번 실현해 보고 싶어요. 그래서 민주주의를 배우려면 광주에 가서 배워라. 이런 모델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 황 - 공직사회 민주화뿐만이 아니고 저희들이 안병하 국장의 사태, 이 상황들을 보면서도 느끼는 게 행정이 너무나 형식주의나 편의주의로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도리어 더 피해를 주는 경우들이 발생한다는 부분들. 행정 편의주의도 적극적으로 깨나갈 필요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김 -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공감인데요. 정말 잘못된 관행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깨면서 시작하려고 그래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시장이 행정을 너무 많이 하면 시청 직원들이 독창성을 잃어버려요. 창의력도 잃고. 시장 눈치 보게 되고. 그래서 좋은 시청에 인력들을 잘 활용해서 시장이 의견들을 수렴하고 종합해서 결단하는. 그런 민주적인 방식들을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 황 – 후보님, 지금 이렇게 출마를 이야기하시면서 하신 말씀, 언론에 나온 얘기를 들어보니까 굉장히 쇼킹한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광주 시청에 전두환 정권에 협력했던 사람의 사진이 걸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 말씀하신 게 맞나요?
◆ 김 - 네. 그 이야기 제가 당에서 지난번에 공천 받는 과정에서 인사말하면서 제가 했던 이야기입니다.
◇ 황 - 어떤 내용입니까? 어떤 의미죠?
◆ 김 - 그 이야기는 사실은 광주라는 곳은 다른 지역하고 조금 다릅니다. 80년도에 그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늘 자만심을 갖고 있잖아요, 자존심을 갖고 있고. 광주항쟁에 대해서 광주 시민들은 정말로 자존심을 다 갖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광주학살의 원흉. 80년도 이후에 지속적으로 광주에서는 전두환 퇴진운동을 했습니다. 학살 원흉, 전두환 퇴진운동. 그런데 그 시점에 청와대 사정수석실에서 근무했다고 하면 글쎄, 광주하고는 좀 안 맞는 정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전두환 정권에 협력한 사람이 최소한 광주시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광주시청에 그런 사람의 사진이 걸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런 표현을 좀 썼어요. 그런데 후보한테는 물론 죄송한 이야기 같지만 제가 이번에 출마하게 된 동기도 그런 이유입니다.
◇ 황 - 앞으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다른 당들의 후보들과 광주시장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김 - 네, 감사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황 - 지금까지 민주평화당 김종배 광주시장 후보와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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