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현의 시선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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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현의 시선집중_민주평화당, 광주시장 후보 확정_김종배 후보_20180516_1-1

■ 방송시간 월요일~금요일 AM 07:30~08:57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최은영
■ 진행 황동현 PD

◇ 황동현 진행자(이하 황) - 민주평화당이 6.13 지방선거 광주시장 후보로 김종배 전 국회의원을 확정했습니다. 광주시장 선거. 더불어민주당 이용섭 후보, 민주평화당 김종배 후보, 정의당 나경채 후보. 그리고 민중당 윤민호 후보 이렇게 4파전으로 치러지게 됐는데요. 김종배 후보는 5.18 시민군 총위원장 출신으로 그 어느 때보다 5.18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들이 높은 요즘 상황 속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 점쳐지는 선거 구도에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평화당 김종배 광주시장 후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김종배 (이하 김) - 안녕하세요.

◇ 황 - 2부에서 안병하 치안감 가족에게 광주시가 지급된 5.18 보상금 환수를 요구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요. 그 내용은 좀 들으셨죠?

◆ 김 - 조금 들었습니다.

◇ 황 - 이런 부분들. 어떻게 보면 광주를 위해서 희생당한 분들에게 광주시가 보상금 환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인데. 그런 것들을 보시면서 5.18 현장에 계셨던 분으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김 - 우리 안병하 경찰국장께서는 5.18 당시에 계엄군들에 의해서 광주 시민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광주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고 해서 거부하고 경찰들을 광주시에서 전부 다 외곽으로 퇴진을 시켰었는데. 그 이후에 많은 고문과 어려움 속에서 지내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광주시에서 그분에 대해서 배려하고 보상해야 한다고 봅니다.

◇ 황 - 광주시에서는 마음은 있으나 행정 행위의 한계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국은 그런 한계를 좀 극복해서 광주시 차원에서 적극적인 방안을 만들어야 하는 노력은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 김 - 시에서 행정적인 문제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양반이 그 당시에 5.18에 했었던 것은 우리 공무원 출신들에게는 굉장한 귀감이라고 저는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시청에서 못하면 시민들 모금이라도 해서 그분에게 보상을 해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집니다.

◇ 황 - 그런 부분들. 여러 가지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상황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광주가 직접 나섰던 게 5.18이고요. 그 5.18의 현장에 우리 후보님이 계셨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를 좀 나누면 좋겠습니다. 민주평화당 광주시장 후보로 출마를 하시게 됐는데 출마를 결심하시게 된 이유부터 들려주시겠습니까?

◆ 김 - 사실은 민주평화당의 지도부인 조배숙, 대표 천정배 의원, 정동영 의원님 등 여러분들께서 사실은 광주시장 출마를 여러 차례 권유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너무 갑작스러운 요청이라서 일단 거부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시간도 너무 없고. 여러 가지로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주변에 많은 분들이 5.18의 항쟁 정신이 광주 정신으로 승화되어 있는데 광주 학살의 원흉이었던 전두환 정권에 협력한 사람이 어떻게 광주시장이 될 수 있냐,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서울시장 후보, 경기지사 후보 등이 시민운동 내지는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민주당 후보로 공천이 되었는데.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는 광주시장이 전두환 정권 핵심인 청와대의 핵심 부서인 사정비서실에서 근무한 사람을 어떻게 광주시장으로 후보를 내놓을 수 있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어요. 저도 마지막으로 그거에 대해서 공감했습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광주의 정체성 확립과 광주 정신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최종적으로 결심하게 됐습니다.

◇ 황 - 광주의 정체성이 확립된다는 말씀을 하셨고. 결국 전두환 정권의 협력자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하신다면 지금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대한 이야기이신가요?

◆ 김 - 그렇죠. 아마 광주시장 더불어민주당 후보인 이용섭 후보를 지칭할 수도 있죠. 제가 광주시장 후보로 나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황 - 왜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방금 이야기하신 것처럼 광주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된다.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광주의 정체성을 우리들이 가져가야 할 그런 이유들. 그다음에 방금 이야기하신 이용섭 후보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런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는 부분들. 더 구체적으로 한번 이야기를 해 주시죠. 어떤 의미신가요?

◆ 김 - 광주는 사실 아픈 과거가 있잖아요. 5.18의 정말 시민 학살이라는 그 아픔을 갖고 있는데. 지금까지 광주는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때 당시에 숭고한 항쟁 정신. 공동체 정신. 이런 것들은 정말 우리가 역사에 길이 우뚝 세워서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최소한 광주시장 만큼은 광주 정신의 DNA가 있는 사람이 시장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소망 때문에.

◇ 황 - 광주 정신은 결국은 5.18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 김 - 그렇죠.

◇ 황 - 우리 후보께서도 5.18 당시 시민군 총 위원장으로 활동하셨고 신군부의 악랄한 그런 진압과정에서 저항을 하셨는데. 5.18 정말 38주기.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후보로 나오시면서 더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 김 - 네, 그렇습니다. 너무 감회가 새롭고요. 참 이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아픔과 처절함을 어떻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5월 항쟁 기간.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와 슬픔을 반복하면서 그 당시에 투쟁했었습니다. 신군부의 무차별한 잔인 학살로 난리통이였잖아요. 우선 그 당시에 사망한 시신들을, 관도 없었어요. 입관부터 해서. 가족들을 확인시키고. 확인된 사람은 상무관에 안치시키는 작업을 제가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총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치안 부재 상태였어요. 자체 치안유지팀을 만들어서 강도 한 건이 없는 정말 아름다운 광주 항쟁을 저희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가지 한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때 당시 시민들이 여름도 되고 그래서 어려웠어요, 보관하기가.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구용상 시장하고 저하고 둘이서 만났습니다. 장례식을 우리가 시민장부터 치르자 해서 합의를 했었는데. 27일로 시민장을 치르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용상 시장하고 저하고 공동으로 장례위원장을 맡고 시민장을 치르기로 했는데. 27일 새벽에 계엄군들이 진압을 해서 결국은 장례식을 못 치렀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 한이 남아 있어서. 정말 내가 시장이 된다면 이런 한을 풀고 시민장으로라도 한번 치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그런 소망들이 그동안에 있었습니다.

◇ 황 - 지금 후보님,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시장과 27일에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를 치르기로 했는데 신군부는 바로 27일 새벽에 도청 진압작전을 실시한 거네요?

◆ 김 - 네,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례식 일정을 잡아놓고 장례를 못 치렀어요. 그게 지금 굉장히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 황 - 그런 상황들이 실질적으로 시장과 합의가 된 사항이기 때문에 신군부의 상층에 보고가 됐을 텐데. 그런 것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압작전을 개시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 김 - 제가 봤을 때는 5월 25일 저녁부터 우리들이 투쟁위원회로 다시 재결성를 했어요, 항쟁지도부로는. 그래서 조직적으로 좀 투쟁할 태세를 갖추었는데. 그런 시민장하고도 맞물려있고 그래서 26일에 자정을 넘기고 27일 새벽에 계엄군들이 저는 진압했다고 보고 있어요.

◇ 황 - 우리 후보께서는 그래서 또 5.18와 밀접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5.18 사형수라고 불리기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5.18 사형수, 이렇게 불리시게 된 연유도 좀 이야기해 주시죠.

◆ 김 - 5.18 사형수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저희들이 마지막에 도청 안에서 한 200여 명이 남아 있었어요. 한 400~500명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계엄군들이 들어온다고 그래서 한 절반 정도가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200명들이 남은 총기들을 들고 지켰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군인들이 3공수 여단, 7공수 여단, 11공수 여단, 박준병 20사단, 31사단, 전투교육사령부. 이 팀들이 합동으로 현대 무기를 들고 작전해 오는데 우리는 카빈소총을 들고 한 200명이 저항을 했어요. 독 안에 든 쥐였고 굉장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때 17명이 죽었어요. 그 과정에서 군인들이 들어온다고 그러니까 저희들끼리 논의를 했는데 여기서 투쟁할 수 있는 사람만 남고 자신 없는 사람은 집에 돌아가라고 했는데 200명 남았습니다. 그리고 온건파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더 이상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투항하고 나가자고 주장했는데. 저는 우리의 요구사항이 하나도 관철되지 않고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지금 매도하고 있는데 사과 한마디도 받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총을 반납하고 투항할 수 있어요 하고 저는 끝까지 주장했었던 강경파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했으면 17명이 안 죽었을 거예요. 그 현장에서 17명이 죽었는데. 그 17명의 죽음이 우리 광주 정신이라고 저는 봅니다. 불의에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투쟁하는 정신, 이게 저는 광주 정신이라고 보고 있어요.

◇ 황 - 그래서 이후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 선고를 받으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 김 - 네, 그렇습니다. 그 이후에 체포돼서 돌아가신 분들은 거기서 돌아가시고 나머지는 체포됐어요. 그래서 3부대 영창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재판을 받았는데. 군대재판에서 변호사라는 사람도 우리가 선임을 못 했어요. 취재하는 사람도 들어와서 사진 한 컷도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외로운 재판들을 받으면서 그때 군사법정에서 제가 사형을 선고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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