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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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7일 “길은, 걷다 보면 생깁니다” <김성민 전남대학교 소아정형외과 교수>

 얼마 전 일본의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아버지 한 분이, 커다란 냄비 앞에서 우동 육수를 정성스레 붓고 계셨습니다. 그 집은 3대째 이어오는 오래된 우동집이었고, 할아버지는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매일 새벽 직접 육수를 끓이며, 손님 앞에서 따뜻한 국물을 부어 주고 계셨습니다. 그의 손끝에는 세월의 주름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고, 그 속엔 평생 한길을 걸어온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 영상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연세에도 저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평생 한 가지 일을 지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저는 소아정형외과와 종양정형외과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50명도 채 되지 않는, 매우 좁고 낯선 길입니다. 처음 이 길을 선택했을 때는 솔직히 확신이 없었습니다. ‘굳이 이 어려운 길을 가야 하나? 남들처럼 더 인기 있는 분야로 가지 않아도 될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실제로 다른 분야를 배우기 위해 병원을 전전하던 시절도 있었지요.

 

 하지만 결국 저는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의 뼈를 맞추고, 종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팔다리를 살리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가다보니 이 일이야말로 제 삶이 걸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불러주실 때면, ‘그래도 한 길은 꾸준히 걸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제가 처음부터 ‘길’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묵묵히 걸어왔을 뿐입니다. 그 길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그것을 ‘길’이라고 불러준 것 같습니다.

 

 가끔 선배 의사들의 정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늘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 평생을 저렇게 사시더니 결국 이렇게 많은 것들을 이루셨구나.” 그분들의 발표에는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수십년간 쌓아온 임상 경험, 수많은 환자들의 삶 속에서 다져진 통찰, 그리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따뜻한 지혜까지... 그 모든 것이 경이롭다는 단어로밖에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들은 단순한 기술이나 지식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길을 걸어온 인생’에서만 나오는 깊이이자 품격이겠지요.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MZ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가치와 개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유롭고 거침이 없습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주저 없이 선택합니다. 그런 모습은 참 신선하고, 젊음의 힘이 느껴져서 보기 좋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더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도 듭니다. 가치 있는 일은 처음부터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하다 보면 그 안에서 빛이 만들어집니다. 조금 힘들다고, 속도가 더디다고, 너무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이 나중에 돌아보면 가장 값진 시간으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흘렸던 땀과 눈물이 사실은 ‘황금 같은 순간’이었다는 걸,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되니까요.

 

 우동집 할아버지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묵묵히, 꾸준히,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살라.” 그분은 세상과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끓이는 국물이 오늘도 어제처럼 깊은 맛을 내길 바랐을 뿐이겠지요. 저 역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의 뼈를 고치고, 그들의 걸음을 되찾아주는 일. 때로는 눈에 띄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 길 위에서 꾸준히 제 손과 마음을 담아가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살아가는 청년 여러분, 우리 모두의 삶에도 ‘한 길’이 필요합니다. 크고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루하루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 발자국이 모여 결국 한 사람의 길이 되고, 그 길이 모여 한 시대의 길이 됩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진심과 꾸준함은 결코 낡지 않습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든 분들게,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하루가, 누군가의 내일을 밝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