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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29일 “웃는 히틀러와 세이렌의 유혹” <한은미 전남대 화학공학과 교수>
1997년 어느 초여름이었습니다. TV 광고 화면에 잔뜩 굳은 표정의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합니다. 독재자의 입꼬리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환한 미소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런 문구가 흘러나왔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웃을 줄 알았다면 현대사는 다시 쓰였을지 모릅니다.” 신제품 껌 광고였습니다.
하지만 광고가 나가자마자 주한 독일대사관은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인류 최악의 학살자를 상업 광고의 가벼운 희극적 소재로 분칠하는 것은, 나치 치하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결국 업체는 광고를 즉각 중단했습니다. 무려 30년 전에도 우리 사회는 타국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금기를 이토록 무겁고 엄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희화화하지 않는 것, 그것이 문명사회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세대가 흐른 오늘, 대한민국의 한 글로벌 기업 안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잔인한 방식의 역사 조롱 마케팅이 버젓이 펼쳐졌습니다. 바로 스타벅스코리아의 사태입니다.
시간을 지난 5월 18일로 돌려봅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숭고한 정신이 깃든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당일, 해당 매장에는 '탱크 데이' 이벤트 문구가 등장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책상에 탁!", 87년 군사정권 시절 차가운 물고문 속에 쓰러져간 청년, 박종철 열사를 연상시키는하는 표현까지 마케팅 코드로 사용했습니다. 국가 폭력의 은폐 용어를 극우 커뮤니티의 반인륜적 놀이 문화 그대로 가져온 도발이었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세월호 참사 추모일인 4월 16일의 이벤트도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상품에 등장한 초록색 여인의 정체,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세이렌(Siren)'이 누구입니까? 매혹적인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 결국 배를 바다 깊숙이 침몰시키는 바다의 괴물입니다.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은 그 통곡의 날에, 배를 침몰시키는 괴물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머그잔 이벤트를 시작한 것입니다.
기업 측은 “고의성은 없었다”, “단순한 마케팅 과정이었다.”는 해명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날짜와 표현들이 너무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변명 뒤에 숨은 잔인한 '조롱 코드'가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낳기에 충분했습니다. 국민들이 정말 듣고 싶었던 건 법률적인 해명이나 형식적인 사과문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 표현들이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왜 어떤 기억은 결코 가볍게 소비될 수 없는지, 그 아픔을 정말 이해하고 있다는 진정성이었습니다.
이미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사건들을 굳이 오늘 이 라디오 전파를 통해 다시 공적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를 금기로 지켜야 하는가, 그 기준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우리 공동체가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희생도, 남영동의 절규도, 세월호 아이들의 마지막 순간도 특정 진영이나 특정 지역만의 기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새겨 놓은 우리 공동체 전체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하는 겁니다. 누군가의 비극이 마케팅 코드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감수성 자체가 무너졌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상품만 파는 조직이 아닙니다. 특히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라면, 그 사회가 아파했던 기억까지 존중할 책임이 있습니다. 광주의 상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영동의 고통도, 세월호의 슬픔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현재입니다. 그 고통 위에 웃음과 마케팅을 덧칠하면서 “의도는 없었다”고 말한다면, 시민들은 결국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에게 희생자의 비극은 정말, 소비 가능한 이벤트였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