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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깊다 ; 김방(金倣) #경양방죽
남도는 깊다 제 8편 김방(金倣)과 경양방죽
- 빛고을 광주는 예로부터 화(火)가 성했던 땅이라 한다. 중농(重農) 정책을 폈던 조선 세종때, 광주목사였던 김방(金倣; 생몰연대 미상)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물과 광주천의 물을 가두어 농업용수로 쓸 수 있도록 경양방죽(景陽湖)를 축조하게 된다.
세종 22년인 1440년, 무려 3년 여에 걸쳐 연인원 50만명이 동원된 대공사 끝에 경양방죽이 완공되었다. 장장 십리(4km)에 달하는 수로, 4만 6천평의 바닥을 석회로 포장, 매우 과학적인 방수장치로 평가받는 이 거대한 인공호수는 일제시대때 1차 매립될 때까지 약 500여 년 동안 광주의 상징이자 명물이었다. 소양호를 가진 춘천, 덕진호를 가진 전주처럼, 조선 세종때부터 근대까지 광주는 호반의 도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방이 경양방죽 축조를 진두지휘할 때 재밌는 전설이 하나 남아있다. 공사가 길어져 인부들이 식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공사는 급한데 공사현장에서 큰 개미집까지 나와 처리방법에 골치를 썩게 되었다. 그러나 김방이 미물도 생명이라 여겨 그걸 건드리지 않고 살려주었더니 개미들이 줄지어 쌀을 물어날려 식량 문제를 해결해 줬다는 것이다.
김방은 개미에게 보은하고 방죽 공사를 무사히 잘 마치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 무등산 아래 오백전을 짓고(*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 오백 나한상을 조성한다. 또 광주의 안녕을 비는 마음을 담아 증심사를 중수(重修)하기도 한다.
지금은 경양방죽이 있었다는 추억만 남기고 사라진 자리. 광주 동구 계림동에는 아직도 개미 전설이 전해오지만, 광주의 대역사를 지휘했던 주역 김방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다만 그를 모시는 제실이 전남 보성군 벌교읍 원당마을에 쓸쓸히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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