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새정부가 한반도 운하를 건설하겠다고 하면서 영산강 운하도
논란 거리로 떠올랐습니다.
"영산강에 운하를 만들어야 한다"
"아니다. 운하를 만들면 안된다"
찬성과 반대 주장이 맞서고 있는데요.
광주 MBC 뉴스는 오늘부터 세차례에 걸쳐
영산강의
과거와 현재,미래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영산강 뱃길의 흔적을 찾아가봤습니다.
윤근수 기자
(기자)
영산강을 가로막고 있는 하구 둑에서
배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봤습니다.
(이펙트-뱃소리)
본류와 영암천이 갈라지는 곳에서
돌기둥 같은 걸 만났습니다.
지나다니는 배들이 멍수바위라는
암초를 피할 수 있도록 세운
일종의 표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한시간 남짓 올라가자
몽탄나루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몽탄대교가 있는 자리입니다.
나루터에는 배가 다닐 때의 흔적과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허물어져가는 이 건물은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 주막이었다고 합니다.
(인터뷰-주민)
-여기 삼각형으로 된 데가 (주막이) 세채가 있었어요. 저기 마늘밭 근처에도 세채가 있었고
여기서 강을 건너다니던 사람들이
하루에 3백명 정도였고,
당시엔 나루터에 활기도 넘쳐났다고 합니다.
(인터뷰-주민)
-그때는 어디 갈 데가 없었고 목포를 많이 이용했지. 주로 시장보러... 제사 준비하느라고...
몽탄대교에서부터는 수심이 낮아서
모터 보트를 타고 달렸습니다.
(이펙트)
사포나루와 석관정 나루 같은
작은 나루터들을 지나고,
새로운 명소가 된 주몽 촬영장도 만났습니다.
(CG)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들었던 자료에는
쌀 2백석을 실을 수 있는 배가
이곳을 지나다닌 걸로 기록돼 있습니다.
<스탠드업>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만
옛날엔 영산강을 따라서
40개 정도의 포구와 나루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잦았다는 걸 의미하는 거겠죠.
포구들 중에서 가장 왕래가 활발했던 곳은
역시 영산포였습니다.
쌀과 면화,소금같은 물건들이 다 모이고,
흑산도 홍어나 신안의 젓갈도
이곳까지 올라와 거래됐습니다.
(인터뷰-주민)
-제주도에서도 여기까지 멸치도 들어와요. 들어온 멸치젓이 선창에 쭉 있었어요. 옛날에는...
중선과 돛단배들이 정박해있는
옛날 영산포 사진은
당시의 영화를 짐작케합니다.
밤낮으로 드나드는 배가 얼마나 많았던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내륙 하천에 등대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포구 주변으로는 큰 시장이 형성됐고,
한양으로 올라갈 곡식도 여기서 보관했습니다.
(인터뷰-뱃길연구소장)
-저기 야트막한 야산 꼭대기가 영산창이 있덨던 자리에요. 남도에서 제일 컸는데 조선조 중엽까지 유지되다가 법성창으로 합쳐졌는데 유지될 때는 8백석 실은 조운선 53척이 여기에 전속돼 있었어요.
위로는 광주로 통하고,
아래로는 남해바다와 연결됐던 영산강
해상 교역의 중심이었고,
남도의 젖줄이었던 영산강은
그러나 지난 81년 하구 둑이 막히면서
흐르지 않는 강으로 변했고,
뱃길의 역사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엠비씨 뉴스 윤근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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