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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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4일 “건강하게 키 크는 사회를 위하여” <김성민 전남대학교 소아정형외과 교수>

 며칠 전, 집 근처 아파트 산책로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몇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너는 어디 거 맞아?” “일주일에 몇 번 맞아?” 순간 귀가 솔깃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는다는 얘기였습니다. “나는 주 6회, 너는?” “우리 집은 다른 회사 거야.” 성장호르몬 치료를 하는 소아정형외과 의사로서, 그 대화는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성장호르몬’이 자연스럽게 오르내리는 시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성장호르몬 치료는 정말 ‘핫’한 주제입니다. 부모님뿐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도 키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대단합니다. 외래 진료를 보다 보면 “우리 아이 키가 너무 작아요. 성장호르몬을 맞아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중 한 아이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키가 작다고 걱정하며 찾아왔는데, 검사 결과 성장호르몬 수치도, 뼈 나이도 모두 정상 범위였습니다. 다만 체중이 또래보다 훨씬 많았죠. 저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네가 키를 키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살을 조금 빼는 거야. 탄산음료부터 끊어보자.” 그 말 한마디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던 걸까요. 두 달 뒤, 그 아이는 10kg을 감량하고 다시 제 앞에 섰습니다. 그때의 표정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일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어른의 한마디, 사회의 분위기 하나가 아이를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키를 키우는 방법은 약이나 주사가 아니라, 삶의 습관 안에 있다’는 메시지를 그 아이는 몸으로 보여준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요즘은 ‘조금이라도 더 크고 싶다’는 마음이 무분별한 성장호르몬 처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장호르몬은 원래 결핍증, 만성 신부전, 터너 증후군 같은 질환을 위한 치료입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까지 “예방 차원에서” 처방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모 방송에서도 이 문제가 크게 다뤄졌습니다. ‘부작용이 많으니 조심하자’, ‘의학적으로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지요. 물론 경고는 필요합니다. 성장호르몬은 인슐린 저항성을 높이거나 두통, 관절통, 부종, 드물게는 뇌압 상승이나 종양 성장과 연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하지 말자”는 말로 해결할 수 있을까? 집값을 예로 들어보죠. 모두가 안정된 삶을 원하지만, 단속이나 비난으로 집값이 떨어지진 않습니다. 진정한 해법은 비난이 아니라 건강한 공급에 있습니다. 주택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듯, 키에 대한 사회적 열망도 건강한 방향으로 풀어줘야 합니다. 

 

 사실 키를 키우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방법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수면, 영양, 칼로리, 체중, 운동. 이 다섯 가지가 성장의 핵심입니다.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 깊은 잠을 잘 때 성장호르몬이 가장 많이 분비되고, 적절한 운동은 성장판의 혈류를 촉진합니다. 단백질과 비타민 D, 칼슘 같은 영양소는 뼈 성장을 돕고, 과체중이나 저체중은 성장의 에너지를 빼앗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사회적으로 지지하고 교육하며, 아이들이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은 **K-pop 음악에 맞춰 줄넘기를 하는 ‘키즈 점프 교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태권도 학원에서도 줄넘기 시간을 따로 두어 아이들이 리듬에 맞춰 즐겁게 뛰도록 지도합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성장판을 자극할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운동이 ‘재미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좋은 예입니다. 또한 충분한 비타민 D 섭취를 위해 맑은 날에는 아이들이 햇빛을 보고 뛰어놀 수 있게 하자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음식 또한 단순히 “골고루 먹자”가 아니라, 체중과 나이에 따른 칼로리와 탄수화물·단백질·지방의 균형을 알리는 영양 캠페인으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건강한 방식의 지식을 아이들과 부모에게 꾸준히 심어주는 것— 그것이 곧 건강한 사회의 ‘성장판’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을 향한 열망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키에 대한 욕망은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감과 기회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누구나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그 꿈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입니다. 그 마음이 불안과 조급함으로 흐르면, 결국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고, 건강한 길로 안내해주는 사회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의사 한 사람의 조언, 부모의 따뜻한 시선, 학교의 작은 변화, 그리고 사회 전체의 메시지가 모이면— 그것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성장시키는 힘이 됩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은 그런 사회입니다. 성장을 비난하는 사회가 아니라, 성장을 지지하고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사회. 아이들이 비교 속에서 움츠러드는 대신, 스스로의 속도로 자라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사회. 그 속에서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부모는 안심하며 지켜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난이 아니라 이해로, 억누름이 아니라 건강한 안내로 나아갈 때— 우리 사회는 단지 키가 큰 아이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고, 삶이 함께 자라는 사회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