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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3일 “느림과 돌봄, 해마가 남긴 질문” <임하리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부관장>
바다 속에는 크고 빠른 생명들만이 살아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곳에는 작고 느리지만 놀라운 지혜를 품은 존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해마입니다. 해마는 말처럼 생긴 머리 때문에 ‘바다의 말’이라 불립니다.
이름의 유래는 단순하지만, 그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해마는 바다에서 가장 느린 물고기 중 하나로, 파도와 해류에 몸을 맡기며 균형을 유지하고, 수컷이 새 생명을 품어 돌보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다의 말’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모양의 묘사가 아니라, 바다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한 생명의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해마는 빠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느림은 생존의 한 방식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주변과 충돌하지 않으며,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맞추는 지혜가 있습니다. 파도가 세차게 밀려올 때도 해마는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습니다. 해마는 꼬리를 말아 해초를 붙잡고, 작은 몸으로 거센 바다의 해류를 견뎌냅니다. 또한 주변 환경에 맞춰 자신의 몸이 드러나지 않게 몸빛을 살짝 바꾸기도 합니다. 해초 사이에서 몸을 세우고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물살이 세질 때도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주변의 해초와 비슷하게 위장을 하고, 꼬리를 해초로 감아 빠르지 않지만 해류와 조류를 견디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마는 ‘돌봄’의 상징입니다. 바다에서 유일하게 수컷이 새 생명을 품는 몇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암컷이 맡긴 알을 자신의 육아 주머니에 넣고 일정 기간 품어 부화시켜 작은 생명을 세상에 내보냅니다. 참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이기도 하지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작은 생명체에 불과하지만, 생명을 이어가는 일에 ‘누가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고, 그저 자연의 질서에 따라 맡은 역할을 다합니다. 그 모습은 돌봄이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지켜내는 존재의 본능임을 보여줍니다.
또 해마는 느림의 상징이기도 한데요. 인간의 세계에서 빠름은 효율이지만, 바다의 세계에서 느림은 지속입니다. 그 느림이 있어야 관계가 이어지고, 그 관계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됩니다. 해마는 작고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서 생명의 균형을 지키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빠름을 능력이라 부르고, 돌봄을 희생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빨라야 하고, 빠르지 않으면 마치 도태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해마의 삶은 그 믿음을 자연스럽게 바꿔줍니다. 가끔은 속도를 늦추어야 보이는 것이 있고, 돌봄은 나눔일 때 더 큰 생명을 잇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해마는 바다 생명체 가운데서도 작고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서 조화의 리듬을 만들고, 그 조화 속에서 생명의 질서를 이어갑니다. 저는 오늘도 바다의 무궁무진한 비밀 속에서 한 가지를 해마를 통해 배웁니다. 또 바다는 우리에게, 그 조용하고 작은 생명체를 통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해마는 빠르지도, 크지도 않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다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그 느린 움직임 속에는 조급하지 않은 삶의 지혜가 있고, 변화무쌍한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미약하고 힘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 존재 하나하나가 바다를 이루고, 세상의 질서를 지켜내는 것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하지만, 묵묵히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존재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