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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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6일 “집은 작은 도시다 〈건축과 주거 공간〉” <오성헌 광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여러분, 오늘 하루에만 몇 개의 문턱을 넘으셨나요? 현관, 주방, 거실, 침실까지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공간의 쉼표와 줄바꿈인 문턱·코너·계단참을 지나갑니다. 그 작은 문장 기호들이 우리의 속도와 기분을 바꾸고, 하루의 기억을 만들어냅니다. 집을 도시로 본다면, 거실은 광장, 복도는 골목, 식탁은 열린 마당입니다. “창은 바람과 빛이 드나드는 문, 수납장은 일상의 짐을 품는 배후 창고, 욕실과 주방은 집의 관리실 같은 생활 인프라 허브입니다.”

 

 오늘은 세 가지 질문으로 집을 다시 읽어봅니다. 집은 어디서 멈추고, 무엇을 보고, 어떻게 숨 쉬는가. 우선 좋은 집에는 현관 앞 한 칸의 여유가 있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우산을 터는 전이 공간이 있으면, 바깥의 속도는 한 번 멈추고 집의 리듬으로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그 한 칸이 없으면 외부의 피로가 거실로 밀려 들어옵니다. 작은 벤치, 얕은 홈, 눈높이 코트 걸이만으로도 전이는 생깁니다. 통과만 있는 집은 피로를, 머무를 이유가 있는 집은 관계를 만듭니다. 빛은 벽보다 강력한 건축 재료입니다. 창턱이 낮고 깊을수록 빛은 바닥을 타고 확산되어 실루엣을 부드럽게 만들고, 공간의 깊이를 늘립니다. 

 

 조명은 일상의 분위기를 만듭니다. 눈높이 정면등은 가장 눈부십니다. 밤에는 벽·천장을 향한 측면 간접조명으로 음영을 정리하며, 집안 분위기를 한껏 은은하게 만듭니다. 커튼은 얇은 쉬어와 두꺼운 암막을 두 겹으로, 낮엔 눈부심을 눌러 시야를 길게 하고, 밤에는 사생활을 지켜줍니다.

 

쾌적함은 향기가 아니라 공기의 경로에서 결정됩니다. 창을 두 개 열었다고 통풍이 되는 건 아닙니다. 대각선으로 서로 마주 보는 창을 열어 바람이 사선으로 통과하게 하고, 주방·욕실 배출과 현관 흡기가 이어지도록, 작은 환기창과 문 하부 틈을 챙기면 집이 훨씬 쾌적해집니다.

 

 밤이 되면 집은 소리의 도시가 됩니다. 러그·패브릭 커튼·책장은 보이지 않는 흡음재입니다. 현관에서 거실이 곧장 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한 번 꺾는 코너를 만들면, 시각적 부담과 소음이 동시에 줄어듭니다. 프라이버시는 문을 닫는 기술이 아니라 그라데이션을 설계하는 기술입니다. 완전 개방, 폐쇄 대신 반투명·반개방·반사각을 활용해 우리의 마음의 피로를 덜어줍니다. 

 

 수납의 목적은 정리가 아니라 흐름입니다. 자주 쓰는 것은 보이는 수납, 드문 물건은 숨김 수납으로 구분하고, 동선의 마찰을 줄입니다. 동선에 걸리지 않는 벽을 얕게 파 홈을 만들면 바닥은 비고 시선은 멀어집니다. 식탁은 전시장이 아니라 작업대입니다. 비워야 쓰임이 생기고, 쓰임이 생겨야 다시 광장이 됩니다.

 

 이외에도 계단의 연속 손잡이, 미끄럼 방지, 발끝을 비추는 간접 조명. 이 세 가지는 유모차·어르신·아이 모두를 위한 보편 핵심 설계 요소입니다. 특히 계단참(landing)은 먼저 생활의 쉼표 기능입니다. 한 칸의 평평함이 속도를 조절하고, 우연한 인사를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집은 단독 주거라도 혼자가 아닙니다. 현관 앞 작은 1평의 공간, 앞마당 나무 한그루, 담벼락의 조명 하나가 이웃들과 공유되면서 동네의 공공성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벤치 하나, 작은 식재 박스 하나만 더해도 곧 대화의 무대가 생겨납니다. 걱정된다면 가볍게 놓고, 쉽게 치우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공공성은 거창한 광장이 아니라 문밖 1미터에서 자랍니다. 좋은 집은 넓은 면적이 아니라 문 앞 한 칸을 비우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그 한 칸의 여백이 모이면 동네가 넓어지고, 우리의 내일도 넉넉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