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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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8일 “도시의 계단, 작은 쉼터” <오성헌 광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안녕하세요, 오늘은 평지 도시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계단의 사회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광주는 비교적 평탄한 도시이지만, 오래된 도심과 주거 골목에는 여전히 높낮이가 다른 미세한 단차가 남아 있습니다. 그 단차를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소규모 계단들은 언뜻 보면 도시의 잔여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상의 흐름을 조율하고, 사람의 속도를 조정하는 미세한 인프라입니다.


 사람들은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자신도 모르게 멈추고, 숨을 고르고, 주변을 바라봅니다. 이 짧은 멈춤의 순간이 바로 도시의 공공성이 작동하는 출발점입니다. 도시의 계단은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생활의 리듬이 잠시 겹쳐지는 사회적 접촉면입니다. 특히 광주의 평지형 골목에서는 계단이 경사 대신 생활의 리듬을 나누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차량이 닿지 않는 좁은 골목, 이웃과 마주치는 길목에서 계단은 걷는 속도를 조절하고, 발걸음이 어긋나며 자연스러운 인사와 대화의 틈을 만들어냅니다. 즉, 계단은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사회적 리듬을 설계하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저는 광주 동명동 일대의 오래된 골목을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낮은 계단들은 대부분 건물 진입부 앞에서 머무름의 자리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 위에 작은 화분을 두고, 또 누군가는 앉아 전화를 받거나 이웃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비록 누가 계획하거나 의도한 시설은 아니었지만, 그 계단은 어느새 주민들이 일상을 공유하는 공공의 무대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물리적 개입 없이도, 공간은 사람의 행동과 시선에 의해 사회적 장소로 변합니다. 앉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공간의 성격은 달라집니다. 앉을 수 있으면 머물게 되고, 머무르면 대화가 생깁니다. 대화가 오가는 순간, 공간은 더 이상 단순한 경로가 아니라, 관계의 매개체가 됩니다. 이 단순한 작동이 도시의 사회적 결을 형성합니다.


 도시사회학자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거리의 눈(eyes on the street)”이라는 표현으로 사람이 머무르고 바라보는 장소가 곧 도시의 신뢰와 안전의 기반이라고 말했습니다. 광주의 낮은 계단 역시 그러한 ‘일상의 시선’이 살아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선이 모여 만들어내는 정서적 안정감, 그것이 바로 도시의 사회적 안전망입니다. 계단의 사회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형태의 디자인보다 관계의 디자인이 중요합니다. 폭이 약간 넓은 단차면, 손잡이의 끝부분, 벽과 계단 사이의 좁은 틈, 이런 미세한 여유는 단순한 공간의 낭비가 아니라, 머무름을 허락하는 건축적 장치입니다. 이 작은 틈에서 사람은 잠시 멈추고, 서로를 인식합니다. 결국 미세한 여백이 일상의 행위를 유도하고, 공간의 쓰임을 스스로 재구성하게 만듭니다.

 

 도시의 품격은 대규모 광장이나 화려한 건축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작은 생활 공간 속에서 사회적 교류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가로 평가됩니다. 광주의 평지형 골목 계단은 비록 낮고 짧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공유의 문화, 머무름의 기술, 관계의 온도가 살아 있습니다. 그 계단의 한 칸이 사람을 멈추게 하고, 한 걸음의 여유가 도시를 다시 숨 쉬게 합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네의 낮은 계단을 한 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나갑니다. 그 짧은 교차가 도시의 사회성을 이어주는 가장 작고도 깊은 장면입니다. 우리가 지나는 수많은 길 중, 가장 오래 남는 길은 결국 사람의 흔적이 겹친 길입니다. “계단 한 단의 여유가 우리의 도시를 바꾼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