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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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8일 “이분법의 야만과 폭력, 세상은 둘이 아니다” <허승준 광주교육대학교 총장>

 요즘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둘로 나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옳음과 그름, 아군과 적군, 성공과 실패, 진보와 보수, 심지어 사랑과 미움까지도 극단의 언어로만 말하려 합니다.

 

 그런데 정말 세상은 그렇게 두 조각으로만 나뉘어 있을까요? 이분법, 즉 세상을 둘로 나누는 사고는 겉보기엔 단순하고 명확해 보입니다. 판단하기 쉽고, 마음이 편하죠.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엔 언제나 야만과 폭력이 숨어 있습니다. ‘둘 중 하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머지 하나는 단순한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대화보다는 논쟁을, 이해보다는 무시를, 공존보다는 배척을 택하게 되죠. 그것이 바로 이분법의 야만과 폭력입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지 않음이 악을 낳는다.” 이분법이 바로 그렇습니다. 세상을 둘로 나누는 순간, 우리의 사고는 멈춥니다. 다름은 틀림이 되고, 틀림은 곧 배척의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이분법은 무사유를 낳고, 무사유는 악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분법이 단순히 둘로 나누어 배척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왜일까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합니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우리는 ‘확실한 답’과 ‘안전한 편’을 찾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강한 확신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위협’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분법은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정체성과 생존의 문제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편을 지키기 위해 더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행동을 취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극단으로 미끄러지는 이유’입니다.

 

 정치의 세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정치를 진보와 보수로 나누지만, 그렇게 나누는 순간 진정한 진보도, 진정한 보수도, 진정한 중도도 사라집니다. 진보는 변화를 향한 용기이고, 보수는 지켜야 할 가치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이 둘은 본래 대립이 아니라 균형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이분법의 논리는 그 균형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진보는 점점 더 급진이 되고, 보수는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하죠. 결국, 양쪽 모두 자기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이분법의 세상에서 양쪽 다 틀렸다고 말하는 양비론은 대안이 될까요? 처음엔 그게 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양비론은 결국 판단의 회피, 그리고 책임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이쪽도 저쪽도 틀렸다고 말하면서 그 사이에서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거죠. 이런 의미에서 양비론 역시 ‘생각의 균형’이 아니라, ‘생각의 없음’입니다. 이분법과 양비론, 둘 다 사고의 게으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습니다. 둘 다 ‘복잡함’을 감당하지 못할 때 생기는 무사유의 반응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둘 중 하나도, 둘 다 아님도 아닌, 그 사이를 깊이 들여다보는 길입니다. 이분법의 야만과 폭력에서 벗어나 세상의 복잡함과 다양함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여러 관점의 합이다.”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진실은 극단의 대립이 아니라, 그 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의 조화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둘이 아닙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하루가 완성되듯, 다름이 공존할 때 인간의 세계는 풍요로워집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분법을 버리고 양 극단 ‘사이’의 공간에서, 수많은 소중한 사실과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정말 둘 중 하나여야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