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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8일 “걷는 도시, 광주” <오성헌 광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도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도, 차를 타고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도시에 발을 디디고, 직접 걸어보는 것입니다. 광주는 특히 그렇습니다. 이 도시는 빠르게 지나칠 때보다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그 표정을 드러냅니다. 속도를 낮출수록, 도시는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 담긴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광주에는 ‘굳이 걷게 되는 길’들이 있습니다. 양림동의 오래된 주거 골목, 동명동의 낮은 건물 사이를 잇는 길, 충장로 뒤편의 생활 가로, 그리고 광주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이 길들은 목적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천천히 걷게 만듭니다. 건축을 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 이유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광주의 걷기 좋은 공간들에는 사람의 속도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광주는 전반적으로 완전히 평평하지도, 그렇다고 급격하게 오르내리지도 않는 미묘한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완만한 높낮이는 길을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리듬 있는 공간으로 만듭니다. 시야는 한 번에 끝까지 열리지 않고, 걷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추게 됩니다. 걷는 행위 자체가 도시를 읽는 시간이 됩니다.
특히 양림동을 걸어보면, 이곳의 공간들은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라기보다 ‘살기 위해’ 형성된 동네라는 느낌을 줍니다. 담장은 과도하게 높지 않고, 집은 길과 지나치게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현관과 창문은 길을 향해 열려 있고, 길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생활이 겹쳐집니다. 이런 공간에서는 도시는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이 됩니다. 누군가는 화분에 물을 주고, 누군가는 계단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며, 누군가는 이웃과 짧은 인사를 나눕니다. 도시는 그렇게 사람의 움직임과 관계 속에서 조금씩 완성됩니다.
반대로, 자동차를 중심으로 계획된 공간에서는 걷는 사람이 늘 가장자리에 놓입니다. 보도는 좁고, 신호는 길며, 머무를 이유는 거의 없습니다. 이곳에서 걷는다는 것은 도시를 경험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통과하는 과정이 됩니다.
건축에서 말하는 ‘걷는 도시’란 보행자 도로의 개수를 늘리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멈출 수 있는 이유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늘이 있는지, 앉을 자리가 있는지, 잠시 시선을 둘 곳이 있는지. 아주 작은 요소들이 걷기의 질을 결정합니다. 광주의 오래된 주거지에는 이런 요소들이 과하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설계된 공공공간이라기보다, 생활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진 공간들입니다. 그래서 이 도시를 걷다 보면 광주의 속도가 사람의 호흡과 닮아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도시는 결국, 얼마나 높은 건물을 세웠는지가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이동하고, 어디에서 멈추며, 무엇을 바라보게 하는가로 기억됩니다. 오늘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금 돌아가더라도 걷고 싶은 길을 한 번 선택해 보시면 어떨까요? 걷는 순간, 광주는 더이상 배경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 장면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