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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24일 "유럽 도시의 기억, 그리고 광주의 풍경" <이민석 전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대학 시절, 저는 생애 처음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도서관이 제 여행 준비의 전부였죠. 지도와 책을 펼쳐두고 나라별, 도시별, 건축가별로 자료를 찾아 복사하고, 꼭 가봐야 할 건축물을 하나하나 목록으로 적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준비의 시간이 오히려 여행보다 더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도착 즈음 비행기에서 처음 본 풍경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런던에 가까워질수록 창 밖으로 보이던 붉게 물든 단풍과 질서정연한 주택단지는 마치 거대한 정원 같았습니다. 자연발생적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풍경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죠. 누군가 오랜 세월 신중하게 정책을 세우고, 계획하고, 지켜왔기에 가능한 모습이었습니다. 도시풍경은 한순간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그리고 꼼꼼한 계획과 정책이 쌓여야만 완성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처음으로 도시의 질서는 건축보다 먼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공항에서 내린 뒤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들어가며 두 번째 놀라움이 찾아왔습니다. 낯선 나라의 지하철 좌석은 좁고 딱딱해서 불편했지만, 피카딜리서커스 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그 불편함은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런던의 거리와 건축물들이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곡선과 리듬, 오래된 건물이 주는 깊이감과 새로운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함께 살아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책으로만 배우던 도시가 이제는 제 눈앞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 했습니다.
세 번째 기억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산 중턱에 있는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였습니다. 1927년, 당대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모여 실험적으로 만든 이 단지는 건축학도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입니다. 실제로 그곳에 서서 건축물의 배치와 디자인, 공간계획을 직접 보고, 원본 도면과 엄청난 역사적인 자료를 보는 것처럼 보관되어 있는 전시장은 그 어떤 것보다 큰 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건, 그 멋진 건축물이 아니라 주거단지 바깥 벤치에 앉아 나란히 담소를 나누던 두 노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푸른 잔디와 나무 그늘 아래서 한가롭게 머무는 그들의 모습은, 결국 좋은 건축이란 좋은 도시 안에서 사람의 삶과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잘 말해주는 장면 같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건축과 도시를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 여행이 제게 남겨준 질문들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건축은 개인의 소유물이지만, 도시란 그 개인 공간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공공의 얼굴입니다. 공공공간과 건축은 공생하고 상생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정작 그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숙제입니다. 더 나은 도시를 위해 누군가는 조금씩 양보하고, 누군가는 조금씩 희생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규칙을 만들고, 또 누군가는 그 규칙을 지켜 풍경을 지켜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누군가가 심고 가꾼 가로수길을, 벤치에서 담소를 나누는 노인의 평화로운 오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제가 사는 광주광역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광주는 풍부한 자연환경과 역사, 문화의 자산을 품고 있는 도시이지만, 무분별한 개발과 개인의 이익만을 앞세운 계획은 도시의 얼굴을 쉽게 지워버리곤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런던과 슈투트가르트에서 보았던 그 오랜 시간의 배려와 신중함입니다. 광주의 길과 골목, 건물과 공원이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살고 싶은 도시로 오래 남을 수 있도록, 도시풍경을 위한 느리고 꼼꼼한 계획이 절실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도시가 누군가의 삶에 작은 위로가 되고, 미래 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풍경이 되길 바라봅니다.
